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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60) 반공포로 석방의 충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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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53년 4월 거제도의 전쟁포로수용소에서 북한이나 중공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이른바 ‘반공포로’들을 분류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해 6월 18일 이들을 전격 석방함으로써 반공포로 문제 협상을 타결한 뒤 휴전협정을 마무리하려던 유엔측과 공산 측 국가들을 대혼란으로 몰고 갔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나는 대통령의 입장을 확인한 다음 상황을 관리해야 했다. 침착한 대응이 중요했다. 대통령이 할 일과, 미군과의 업무 협조가 반드시 필요한 한국의 육군참모총장이 할 일은 다를 것이었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전화를 집어 들고 경무대 비서실을 찾았다.

“미군 항의 거셉니다”에 “내가 했다고 그래” … 이승만은 단호했다

 경무대 숙직 당번인 비서관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대통령을 깨워서 전화를 받으시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경무대 비서관은 “곤란하다. 대통령을 깨울 수는 없다”며 난색을 표명했다. 거듭 이어지는 내 요구에도 그는 계속 버텼다.

 세 번인가를 전화했으나 그 비서관은 좀체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전화에서 “국가의 비상사태다. 대통령께 반드시 보고해야 한다. 더 이상 막으면 곤란하다”면서 그를 다그쳤다. 그러자 비서관은 “잠시 기다려보라”고 했다. 꽤 시간이 흘렀다. 한참 뒤에 대통령이 나왔다.

 나는 “각하, 지금 클라크 장군과 테일러 장군 등으로부터 전화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아주 다급하게 따져 묻고 있습니다. 어떻게 대처하는 게 옳습니까”라고 물었다. 듣고만 있던 대통령은 잠시 뜸을 들인 뒤 “그렇군. 미군들에게 내가 했다고 그래”라고 대답했다.

 대통령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했다고 그래”라고만 언급했다. 이어 대통령은 내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으면서 머뭇거리자 “내가 내일 프레스 릴리스(Press release·언론발표)할거야”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를 끊은 뒤 그 내용을 마크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 로저스 미 군사고문단장, KCOMZ(미 병참관구사령부) 헤렌 소장에게 모두 알려줬다. 그들은 그런 내 전언을 들은 뒤 다른 말이 없었다.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사후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다음날 사정은 자세히 밝혀졌다. 원용덕 소장이 이끄는 헌병총사령부는 사전에 거제와 광주, 논산 등의 수용소를 경비하던 예하 헌병들에게 자리를 이탈하라는 지침을 하달했고, 18일 당일에는 헌병총사령부 요원들이 수용소를 돌아다니며 철조망과 전기를 끊었다.

 헌병과 경찰이 직접 포로들을 안내했고, 각 지방의 도지사와 시장· 군수 등은 민간인 복장을 탈출 포로들에게 지급하는 등 긴밀하게 협력했다. 민간에서도 적극 이들을 숨겨줬으니 민(民)·군(軍)·관(官)이 모두 나서서 포로들을 우리의 품으로 끌어 들였던 셈이다.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은 바위와 같았다. 미국을 상대로 벌이는 막판 전략과 전술이 최고 강도(强度)를 자랑했고, 실행에 있어서도 추호의 흔들림이 없었다. 내 입장에서 볼 때, 대통령의 전략가적인 기질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미국에 누가 반공포로 석방을 주도했느냐는 문제를 말할 때였다.

 대통령은 휴전회담 자체를 아예 원점으로 돌려 한반도의 전쟁에 다시 불을 붙일 수도 있는 그런 조치를 취하면서 여러 가지 숙고(熟考)가 필요한 사항을 놓치지 않았다. 그 가운데 중요했던 것 하나가 미군과의 협조문제였다. 당장 휴전협상의 모든 상황을 되돌려 종국에는 재차(再次)의 전쟁까지 다다를 수 있는 조치를 취했더라도 미군과의 협조는 반드시 이어져야 했다. 모든 정세를 한꺼번에 뒤엎을 수 있는 파국(破局)적인 카드이기는 했으나 숨을 되돌릴 공간은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내가 “미군 지휘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대통령이 “내가 했다고 그래”라고 한 대답은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만약 세계가 놀랄 만한 사건을 일으킨 뒤 그 사건의 주체를 나로 지정해 대응케 했을 경우 미군과의 원활한 협조 채널이 상실될 수 있다는 점을 대통령은 깊이 생각한 것이다.

 대통령은 당시 대한민국의 틀을 주재(主宰)하는 최고 지도자였다. 국군을 실질적으로 통수하는 결정권자이기도 했다. 나는 그 밑에 있던 플레이어(Player)의 하나였다. 큰 틀에서 대통령이 내리는 정책적 결단을 실행하고 현실화하는 창구(窓口)이자 채널이기도 했다.

 대통령은 그 점을 충분히 짚었다. 창구와 채널을 닫으면 소통의 방법이 막다른 골목처럼 막히는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공산군과 마주 선 전선(戰線)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는 최악의 경우였다. 전선을 힘겹게나마 지탱하는 중요하면서 유일한 방도(方途), 즉 미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스스로 제거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다행히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있게 됐다. 미군과의 협조는 전과 같았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행정부가 내린 ‘휴전 조기 마감’의 정책결정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조치를 이승만 대통령이 취했으나 나는 어쨌든 그런 부담을 지지 않아도 좋았다.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하기 전에 휴전에 관한 몇 가지 약속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낸 상태였다. 미 국무부에서 차관보를 서울로 보내 휴전의 전제로 미국이 약속한 상호방위조약, 경제원조 등을 협의키로 했으며 대통령은 이에 동의했다. 송환을 원치 않는 반공 포로들에 대한 안전장치 또한 미국과의 교섭을 통해 확실히 받아둔 상태였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더 큰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전쟁의 휴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진지하게 한국과의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제시한 것이다. 대통령 스스로는 강력한 반공의지를 국내에 과시함으로써 국내 여론을 한 곳에 모아 대외 교섭에서 일치된 힘을 보여준다는 정치적 의도를 관철한 셈이었다.

 이 대통령의 조치가 취해진 뒤 국내 여론은 뜨겁게 반응했다. 그러나 세계 여론은 매우 비판적이었다. 전쟁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파국적인 조치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가 아침에 일어나 면도를 하다 한국에서 터진 이 놀라운 뉴스를 듣고서는 그만 살을 베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워싱턴은 곧 강력한 항의에 나섰다. 한국 전선을 관리하는 미 고위 지휘관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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