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59) 세계를 뒤흔든 한국발 뉴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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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기간 중에 붙잡힌 공산 포로 중에서 반공 성향의 포로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그는 “반공 포로를 무조건 석방해 자유의 품에 안아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1952년 7월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이 대통령(앞줄 왼쪽에서 둘째)이 포로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로저스 미 군사고문단장은 나와 애환(哀歡)을 늘 함께하던 사람이었다. 당시 그의 계급은 소장. 미 8군과 한국군의 가교(架橋) 역할을 담당하는 고문단의 단장이었으니, 그가 움직이는 동선(動線)은 나와 거의 같았다. 전선 시찰에 늘 동행했고, 일상적인 업무도 나와 함께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 8군 사령부가 서울에 있었던 반면에, 한국군 수뇌부와 긴밀히 연락을 유지해야 했던 그의 고문단은 대구 육군본부의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전화통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아주 컸다. “백 장군, 도대체 전쟁포로(POW·prisoner of war)를 왜 석방한 것입니까. 아주 큰일이 났습니다. 어떤 경위입니까.” 다급한 목소리로 그가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상황을 더 알아본 뒤에 연락을 주겠다”고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어 요란한 소리로 울어대는 다른 전화 한 통을 들었다. 미 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장군이었다. 마찬가지였다. 아주 화가 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내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백 총장,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겁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전쟁포로가 왜 밖으로 나온 겁니까”라면서 그 역시 속사포와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나는 로저스 미 군사고문단장에게 했던 대답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기다려 보라. 연락을 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음 전화는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차례였다. 도쿄에서 그가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고든 로저스(1901~67)

 그 역시 “어떻게 일이 벌어진 것인지 대답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내 대답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뒤 상황을 잘 알아본 다음에 연락을 주겠다는 말만 거듭했다. 다음 전화가 또 울렸다. 이번에는 포로를 관리하고 있던 KCOMZ(미군 병참관구사령부) 사령관 헤렌 소장이었다. 그는 마구 화를 내고 있었다. 거친 목소리로 같은 내용의 질문을 해대면서 나를 마구 몰아붙였다. 나는 역시 같은 대답만 되풀이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대답할 위치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내게 암시한 ‘과제’라는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올 것이 온 셈이고, 나는 이 문제를 잘 처리해야 했다. 미군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 게 분명했다. 나는 6월 18일 일상적인 업무를 마치고 관사에 돌아와 잠을 청했지만, 곧 큰일이 벌어질 것이란 점을 알고 있었다.

 전날인 6월 17일이었다. 석주암 육군본부 헌병감이 내 사무실에 들어오더니 보고를 했다. “(원용덕 장군의) 헌병총사령부에 심상찮은 움직임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저 듣기만 했다. ‘이제 움직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입 밖으로 그 내용을 꺼내지 않았다.

 6월 18일 밤 거제와 논산 등 각 지역에 분산돼 있던 포로수용소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에 갇혀서 자유의 품을 그리워하던 북한군 반공 포로 2만5000명이 순식간에 그 문을 빠져나와 한국의 민가에 숨어들고 말았다. 대통령의 끈질긴 승부사적 기질이 빚어낸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포로의 관리는 미군의 KCOMZ가 맡고 있었으나 실제 경비는 한국군이 책임지고 있었다. 특히 수용소 주변 경비를 담당했던 한국 헌병들은 헌병총사령부가 내린 명령에 따라 18일 밤 수용소에서 철수해 포로들을 한꺼번에 탈출하도록 했다. 반공 포로 2만5000명은 수용소 문을 빠져나오자마자 그들에게 건네진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민가에 신속하게 숨어들었다. 모든 과정이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한국의 지방 공무원이나 경찰은 이들에게 직접 민간인이 입는 옷을 제공했고, 안내까지 해서 민가에 숨어 있도록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포로수용소 경비를 담당했던 한국군은 과감하게 움직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일부 수용소에서는 한국군이 미군 지휘관의 명령을 아예 무시하면서 행동했고, 다른 한 곳에서는 탈출 포로들이 안전하게 민가에 숨어들 때까지 현장에 섞여 있던 미군 경비병에게 총구를 들이대기도 했다. 2~3일 흐르는 동안에도 수용소에서는 나머지 2000여 명의 북한군 반공 포로와 중공군 포로들이 탈출에 성공했다. 그래서 모두 합쳐 2만7000명의 반공 포로들이 수용소 밖으로 나가 자유의 품에 안기는 사건이었다. 북한군 포로 중에서는 송환을 원하는 9000여 명의 친공(親共) 포로를 제외하고 모두 빠져나온 셈이었다.

 한국 민간과 국군, 경찰의 협력도 매우 잘 이뤄졌다. 한국 전선을 취재하고 있던 미국이나 서방 국가의 기자들이 반공 포로를 인터뷰하기 위해 길거리로 찾아 나섰을 때 일부 경찰과 민간인은 그들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미군이 직접 나서서 포로 수색을 할 때면 감쪽같이 이들을 따돌리는 일이 벌어졌다고 마크 클라크 장군은 회고했다.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미군이 포로들을 붙잡아 수용소에 다시 수감한다면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미군에 저항하겠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한 셈이었다. 전선에서 공산군에 맞서 함께 싸웠던 국군과 미군이 자칫 서로 무력충돌을 빚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분위기는 매우 험악했다.

 건드리면 터져버리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미군은 그런 상황을 감내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미군이 포로를 찾기 위한 수색활동을 중단키로 한 것이었다.

 그런 엄청난 상황이 추가로 벌어지기 시작했던 19일의 새벽은 아주 긴박했다. 미군 최고위 지휘관들은 내게 해명을 요구했다. 거친 목소리로 항의도 했다. 나는 그런 그들의 전화를 받은 뒤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고, 자칫 잘못한다면 모든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대통령과의 통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응접실에 놓인 직통전화를 집어 들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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