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6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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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8

분명히, 슬프진 않았다. 나는 다만 이사장의 두툼한 손가락 너머로 흐르는 어떤, 다른 손가락들의 향긋한 감촉을 찾아 헤맸을 뿐이었다. 미소보살의 말에 깃을 달고 나선 건 애기보살이었다. 애기보살이 “엄마…….” 하고 미소보살을 불렀다. 울음이 조금 섞인 목소리였다. 미소보살이 왜 불쌍하다고 하고, 애기보살은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전무했다. 어머니가 죽은 것은 내가 다섯 살 때라고 들었다.

그게 전부였다. 사진 한 장 본 일이 없었으며, 이야기를 들은 일도 없었다. 호적에도 어머니가 기재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는 걸 보면 아마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길에서 길로 떠돌다 만나 잠시 연을 맺었었을 터였다. 그러니, 모두 상관없는 일이었다. 팔뚝 위의 향은 이미 다 타고 없었다. 나는 그러나 무심결에 볼을 쓰다듬다 말고 스스로 깜작 놀랐다. 정말, 눈물이 볼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이로웠다. 애간장이 찢어지는 슬픔 속에서도 눈물을 실제로 흘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독이 빠지는 게야.”
이사장이 내 발을 수건으로 닦아주면서 말했다.
“눈물엔 카테콜라민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들어 있어. 정화시키는 덴 눈물이 약이지. 마늘이나 양파를 깔 때 흘리는 눈물엔 카테콜라민이 안 들어 있다니 그것도 신기하고. 어쨌든, 좋은 현상이야. 참지 말고 울게.”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미소보살과 어린 애기보살이 나를 따라 울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눈물을 사고무친한 슬픔의 정한(情恨)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나는 당황했고, 또 부끄러웠다. 미소보살이 손수건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고, 이사장은 다 씻긴 내 발을 수건으로 닦으며 대야 밖으로 내려놓았다. “발을 씻기는 건 사랑한다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야.”라고 이사장은 계속 말했다. 지금까지 생(生)을 걸어오며 지었던 죄를 다 버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다 버리고 “새로운 시간 속을 새롭게 걸어가라.”고 발을 씻겨준다고 했다. 눈물이 이사장의 그 말에 더 솟구쳐 나왔다. 사람들이 연민에 찬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 애기보살의 발을 씻길 차례였다.
이사장에게 발목을 잡힌 애기보살이 언제 울었냐는 듯이 몸을 뒤채면서 깨득깨득 웃었다. 간지러운 모양이었다. “이사장님…… 꼭 예수님 같아.” 애기보살이 청명하게 우짖고 있었다. 눈물은 꼭 슬픔의 자각에 의해서만 불려나오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런 슬픔도 없이, 제멋대로 흘러나온 나의 눈물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민망하고 창피해 고개를 한껏 숙였다. 애기보살과 달리, 여린은 조용했다. 나는 눈물 젖은 눈으로 이사장이 씻기고 있는 여린의 하얀 발목을 보았다. 아기처럼 작은 발이었다. 그리스도가 유월절 최후의 만찬에서 열두 제자의 발을 씻겼었다는 성경 내용이 비로소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이사장은 정말로 그리스도가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새로운 ‘패밀리’를 받아들이는 의식의 끝은 포도주였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온 이사장이 크리스털 잔마다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나는 술을 먹어본 일이 없었다. “자, 새 가족을 환영하면서…….”라고 이사장이 말하면서 잔을 들었다. 기도는 따로 없었지만 기도하는 느낌이었다. 그리스도는 먼저 떡을 떼어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이어서 포도주를 잔마다 채워주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언약이니, 이것을 다 마시라.” 하셨다. 나는 잔을 든 채 이사장이 내릴 언약의 축복을 기다렸다. 그것은 기쁘고도 두려운 일이었다. 만약 이사장이 그리스도라면 그 다음의 말은 내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신다면 나는 기꺼이 유다처럼 대답할 것이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이사장은 그러나 아무런 비유의 축복도 내리지 않았다.
잔과 잔이 허공에서 가볍게 부딪쳤다. 크리스털은 크리스털끼리 부딪혀, 감람나무 젊은 잎새를 건들고 날아오르는 새처럼 청명하게 울었다. 나는 못 먹는 술을 조금 목에 넘겼다. 피 같은 포도주였다. 피의 언약은 따로 없었으나 피의 언약처럼 나는 느꼈다. 그렇지만 ‘최후의 만찬’에서 나눈 그 언약은 알고 보면 그리스도 한 사람만이 견디고 사수해야 할 고독한 언약에 불과했다. 때가 오면 누구는 하루에 ‘세 번’ 그를 부인할 것이고, 또 그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누구는 그를 ‘팔 것’이며, 이윽고 모두 ‘양의 떼’처럼 흩어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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