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난민’ 베가스, PGA 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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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호프 클래식에서 연장전 끝에 PGA 투어 생애 첫 승을 한 뒤 환호하는 호나탄 베가스. [라퀸타(미국 캘리포니아주) AFP=연합뉴스]

오직 골프를 위해 고국 베네수엘라를 떠난 소년이 있다. 소년은 10년 뒤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PGA 투어에서 생애 첫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24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열린 PGA 투어 밥 호프 클래식에서 우승한 호나탄 베가스(27)의 얘기다.

 베가스는 5라운드 합계 27언더파를 기록해 개리 우드랜드, 빌 하스(이상 미국)와 함께 연장에 들어갔다. 하스는 18번 홀(파5)에서 열린 연장 첫 홀에서 탈락했다. 베가스는 10번 홀(파4)에서 열린 연장 두 번째 홀에서 티샷을 물에 빠뜨리고도 3.9m짜리 파 퍼트를 성공시켜 우드랜드를 제쳤다. PGA 를 제패한 최초의 베네수엘라 골퍼가 탄생한 것이다.

 어린 시절 빗자루와 돌을 가지고 골프를 시작했던 베가스는 17세이던 2001년 고국을 등졌다. 베네수엘라 유전지대의 마루틴에서 태어난 베가스는 골프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남미의 대표적 좌파 포퓰리스트인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골프는 부르주아의 스포츠”라고 규정했다. 그의 한마디에 베네수엘라의 골프장을 주택단지나 학교, 병원 시설들이 잠식했다.

 베가스의 아버지 카를로스는 식당 주인이자 9홀의 퍼블릭 골프장 관리인이었다. 골프장이 폐쇄돼 아들이 더 이상 골프를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아들을 미국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목적지는 텍사스주 휴스턴이었다. 그곳에는 베가스처럼 ‘골프 탄압’을 피해 먼저 건너간 친구들이 있었다.

 베가스의 짐은 골프백과 여행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당시 그에게 영어를 가르친 커크는 “그의 백은 싸구려 클럽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했다. 베가스는 낮에는 골프를 치고 밤에는 공부를 한 끝에 텍사스대 골프부의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대학 4학년이던 지난해 PGA 2부 투어에서 상금랭킹 7위에 올라 2011시즌 PGA투어 카드를 따냈다. 베네수엘라 최초의 PGA 투어 멤버가 된 베가스는 다섯 번째 대회 만에 우승하는 작은 기적을 이뤘다. 우승상금(90만 달러·약 10억8000만원)은 지난해 그가 2부 투어에서 벌어들인 총수입(33만 달러)의 2.7배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베가스는 그림 같은 파 퍼팅으로 우승을 결정지은 뒤 “꿈이 이루어졌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나는 목표를 정하면 그걸 위해 죽을 수 있다”는 말로 집념을 드러냈다. 차베스 대통령을 향해 “골프 정책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싶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최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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