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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열도 녹인 타이거마스크 선행 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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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소영
도쿄 특파원

일본의 유명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이노우에 히사시(井上ひさし·1934∼2010)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국에선 연극 ‘달님은 이쁘기도 하셔라’의 원작자로, 또 반전운동가로 알려진 그는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의붓아버지의 학대를 받는 아이였다. 가난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아동양호시설(보육원)에 맡겨진 이노우에는 때때로 불량 소년들과 어울렸고, 중학생이 되면서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어느 날 그가 한 책방에서 국어사전을 훔치다가 책방을 지키던 할머니에게 붙잡혔다. 할머니는 “그런 짓을 하면 우리는 뭘 먹고 살겠느냐”며 이노우에에게 뒤뜰에 있는 장작을 패라고 시켰다.

그 할머니는 장작을 모두 팬 이노우에의 손에 국어사전과 함께 사전값을 뺀 일당을 쥐여줬다. “이렇게 일을 하면 책을 살 수 있는 거란다.” 훗날 작가가 된 이노우에는 문집에 “그 할머니가 내게 성실한 삶을 깨우쳐줬다. 아무리 갚아도 다 갚지 못할 큰 은혜”라고 회상했다. 그는 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자 고향인 야마가타(山形)현 가와니시(川西) 마을에 자신의 장서들을 기증해 도서관을 세우는가 하면, 현지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농업교실 ‘생활자 대학교’를 설립했다. 또 그 책방이 있었던 이와테(岩手)현 이치노세키(一)시에서 평생 동료들과 함께 무료 문장강습을 열었다. 이를 두고 이노우에는 ‘은혜 보내기(恩送り)’라고 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은혜를 직접 그 사람에게 갚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은혜가 돌고 도는 세상을 만들자는 취지였다.

연초부터 일본 열도를 녹이고 있는 타이거 마스크 열풍은 이노우에의 ‘은혜 보내기’와 맥을 같이한다. 1960∼70년대 인기만화 주인공인 타이거 마스크의 본명 다테 나오토(伊達直人)의 이름으로 전국보육원에 책가방과 학용품 등을 기부하는 릴레이 선행이 이어지고 있다. 만화에서 보육원 출신인 다테 나오토는 복면을 쓴 레슬러로 활약하며 대전료를 보육원에 기부하는 정의의 사도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군마(群馬)현의 한 보육원에 다테 나오토라고 밝힌 익명의 기부자가 책가방 10개를 보낸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비슷한 기부가 계속되고 있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은 갑부들의 통 큰 기부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700여 명의 다테 나오토가 불우 아동들에게 보낸 선물이 책가방은 620여 개, 현금과 상품권은 2400만 엔(약 3억원)에 달한다. 쌀과 학용품·옷 등 생활필수품도 답지하고 있다고 한다. 급기야 몇몇 기업들이 불우 아동들에게 책가방을 보내겠다며 기부를 약속하고 나섰다.

장기불황으로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지난해 말 현재 일본의 생활보호 대상은 역대 최다인 141만여 가구에 달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4만 달러가 넘는 경제대국의 암울한 현실이다. 하지만 무수한 타이거 마스크의 선행은 이런 통계를 뛰어넘는 힘을 갖고 있다. 얼굴도 모르는 타이거 마스크의 온정을 느끼며 자란 아이들이 훗날 제2, 제3의 이노우에로 일본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테니까.

박소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