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부상장교 간호하다 인연 … 뒷바라지 59년째 끝없는 헌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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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유망한 군인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다쳐 평생을 병상에서 보내야 하는 게 너무 안타까워 어떻게든 돕고 싶었습니다.”

 17일 서울고 총동창회가 주는 ‘고마운 서울 가족상’을 받는 강순이(75·부산시 사하구 괴정1동·사진 오른쪽)씨는 “부상당해 병원에 실려온 남편을 처음 만나 함께 보낸 세월이 벌써 60년이 다 돼가네요”라며 이같이 말했다.

 서울고 졸업생으로 군인이었던 강씨의 남편 목진홍(81·사진 왼쪽)씨는 1952년 겨울 경기도 문산 전투에서 머리와 온몸에 총상을 입고 부산 제3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네 번 수술을 받았지만 반신불수 판정을 받았다. 머리에 박힌 7개의 파편도 제거 불가능 판정을 받았다.

 전쟁 당시 부산지역 ‘재건촉진회’ 회원으로 제3육군병원에서 간호업무를 담당했던 강씨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잘 생기고 앞길 창창한 군인’이 평생을 병상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정성스레 간호하며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위로했고 목씨는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5년간의 ‘병상 교제’ 끝에 1957년 12월에 결혼했다. 강씨 집안의 반대는 거셌다. 하지만, “아픈 사람을 돌보며 평생 살겠다”는 강씨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결혼 후 병세가 호전되면서 목씨는 58년 말 퇴원했다. 하지만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걸음을 걸을 수 있을 뿐 정상적인 활동은 불가능했다. 강씨는 수시로 집에 돌아가 남편과 아이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병원 일은 할 수 없었다.

부산 국제시장 길에 좌판을 깔고 옷장사를 시작했다. 강씨가 남편을 부축하면서 둘이 함께 행상도 해봤지만 목씨의 통증은 더해갔다. 강씨는 “그 시절에 안 해본 일이 없다”며 “장사를 하고 돌아와 집에서 밤새 수출품에 수를 놓는 일도 했다”고 말했다.

 어려운 살림에서도 허리띠를 조르고 졸라 한푼 두푼 돈을 모아 구멍가게, 양계장 등을 하며 남편과 네 남매를 뒷바라지했다. 다행히 네 남매는 공부를 잘했다. 막내딸은 치과의사다. 강씨는 “제대로 된 공부방도 마련해 주지 못했는데 모두 알아서 공부를 잘해준 게 고마울 뿐” 이라며 “평생 병원 신세를 지고 있지만 그래도 남편과 오래 오래 잘 살고 싶다”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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