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착착 붙는 생새우 무조림, 보양식 같은 들깨 뭇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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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호 10면

나는 어릴 적 익은 무를 아주 싫어했다. 대신 아작거리는 생무는 좋아했다. 김치 담그는 함지박 옆에 붙어 앉아 하염없이 집어 먹고는 냄새 나는 트림을 하기 일쑤였고 동치미나 총각무김치를 배추김치보다 훨씬 좋아하는 식성이었다. 그럼에도 말캉하게 익은 무는 도대체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쇠고기뭇국을 끓이면 무는 건지고 먹었고 무나물은 손도 안 댔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44> 12~1월에 한창 맛있는 무

어른들은 늦가을이나 한겨울에 무밥이나 무시루떡 같은 것을 별미로 해 드셨다. 무밥은 마치 콩나물밥이나 나물밥처럼 무를 채 썰어 쌀과 섞어 밥을 하고 들기름을 넣은 양념간장에 비벼 먹는 것이다. 무시루떡은 마치 멥쌀가루로 켜켜이 붉은 팥을 넣은 시루떡을 할 때 마치 호박오가리를 넣듯 무채를 넣어 찐 떡이다. 나는 콩나물밥과 김치밥은 좋아했고 그냥 시루떡이나 호박오가리 넣은 시루떡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거기에 무만 들어가면 고개를 돌렸으니 내가 싫어하는 것은 오로지 멀컹하게 익은 무였다.

결혼 후 여러 음식을 하면서 식성이 다양해졌지만 멀컹하게 익은 무는 좀처럼 밥상에 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삶은 무에 대해서는 남편도 나와 똑같은 식성이었던 것이다. 물론 나도 남편도 푹 곤 고깃국에 처음부터 덩어리째 삶아 고기국물 맛이 충분히 밴 무국은 그런대로 좋아했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싫어하는 음식이 같으니 그건 참 다행한 일이었다.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기도 하다. 나도 남편도 나이가 들면서 어느새인가 익은 무를 먹기 시작했다. 특히 올겨울에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무나물까지 해 먹기 시작했다.

무는 늦가을이 제철이다. 겨우내 시장에 나오는 무는 늦가을에 수확한 달고 맛있는 무를 저장했다 파는 것이다. 그러니 겨울이 깊어갈수록 무 맛은 떨어진다. 12월과 1월에 한창 맛있던 무는 2월 중순을 넘으면 확실히 맛이 없어진다. 이때는 바람이 들거나 상한 무도 많아진다. 월동을 하기 위해 뿌리에 잔뜩 저장했던 영양소와 수분이 점차 빠지면서 마치 중년 여자들 골다공증 생기듯 무 안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하고 가끔 까맣게 상하기도 하는 것이다. 초봄이 되면 제주도에서 겨울에 키운 무가 나오기 시작하고 봄부터 여름까지는 온실에서 새로 키운 햇무가 함께 출하된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 무는 제철이 아니므로 물이 많고 싱겁다. 그러니 지금부터 2월 초까지가 맛있는 무로 반찬을 해 먹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무로 만드는 가장 쉬운 반찬은 무나물이다. 채 썬 무를 참기름에 볶고 소금이나 조선간장으로 간을 해서 먹는 것이다. 아무런 가미를 하지 않아도 맛이 있는데 이런 맛은 여름 무에서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다. 슴슴한 무나물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무와 생새우를 넣어 조린 무조림은 좋아하게 마련이다. 고등어나 갈치를 조릴 때 넣은 무가 정작 생선보다 더 맛있는데 생새우무조림도 그런 맛이다.

단 고등어나 갈치처럼 기름진 진한 맛은 아니고 새우의 달고 깨끗한 맛이 돋보이는 음식이다. 조리법도 간단하다. 무를 토막 내고 김장철에 넉넉하게 사놓았다 냉동실에 얼려 놓은 생새우를 함께 넣는다. 여기에 간장, 고추장, 약간의 설탕을 넣고 자작하게 물을 부은 뒤 조린다. 새우의 달착지근한 맛이 무에 스며들어 짭짤하고 입에 착 붙는다. 게다가 이 반찬은 여러 끼 먹어도 비린내가 나지 않아 좋다. 고등어조림이나 갈치조림 속의 무가 아무리 맛있어도 남은 것을 냉장고에 넣었다 다시 데워 먹으면 비린내가 나는데, 이것은 넉넉히 조려놓고 끼니때마다 데워 먹으면 아주 편하다.

가장 맛있는 별식은 들깨뭇국이다. 쉽게 만들려면 무를 채 썬 것을 참기름에 볶다 쌀뜨물을 자작하게 넣고 끓이고, 여기에 껍질 벗긴 들깨가루를 넣어 한소끔 더 끓이는 방법이다. 뽀얀 들깨국물 덕분에 보양식처럼 느껴지지만 조리방법으로는 거의 거저먹기나 다름없이 쉽다.

이보다 좀 더 맑은 들깨 맛을 원하면 손이 많이 가는 조리방법을 택해야 한다. 위의 방법은 무를 볶은 참기름에 볶은 들깨가루까지 섞여 기름 맛이 많이 난다. 그에 비해 생들깨를 재료로 쓰면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맑은 들깨 향을 맛볼 수 있다. 생 들깨를 물에 잘 씻어 돌과 불순물을 골라낸다. 깨는 물에 넣으면 모두 동동 뜨고 돌은 가라앉으므로 그저 조리로 건지기만 하면 되는데, 깨를 건지면서 약간의 불순물들을 골라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건지는 과정에서 물 묻은 깨는 그릇에 엄청나게 달라붙는다. 지신밟기 때 축원하는 말로 “물 묻은 바가지에 깨 달라붙듯이 만복아 다갈다갈 붙으소서” 하는 말이 있는데, 깨를 씻어보고 나서야 이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실감이 났다.

생들깨를 믹서에 간 후 고운 체에 받쳐 껍질을 걸러낸다. 이 과정이 번거롭고 시간도 좀 걸린다. 이것을 해 먹겠다는 생각을 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과정이다. 거친 들깨 껍질이 참을 만하다 싶으면 그냥 믹서에 오래오래 곱게 갈아 쓰면 된다. 좀 더 고운 맛을 원하면 어쩔 수 없이 걸러야 하는데, 이때 나는 몇 년 전에 사놓은 두유제조기를 이용한다. 콩을 넣는 자리에 생 들깨를 넣고 작동시키면 따끈한 들깨 국물이 껍질과 분리되어 나온다. 이렇게 만든 들깨 국물을 냄비에 붓고 무를 채 썰어 넣는다. 이렇게 끓이다 소금으로 간을 하고 마늘을 조금 넣으면 완성된다.

이런 뭇국은 정말 보양식이라며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한 숟가락 뜨니 기름내도 나지 않는 맑은 들깨 향이 코를 간질인다. 그 속에 든 무가 시원한 맛을 더해주면서 들깨의 약간 독한 맛을 적절히 중화시킨다. 아침에는 약간의 밥과 곁들여 먹으면 속이 든든하고, 저녁에는 소화에도 부담이 없다. 정말 내가, 무나물과 뭇국이 맛있다는 글을 쓰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그런데 어쩌랴, 맛있는 것을. “어쩌겠어. 이제 할머니 식성으로 변한 거여”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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