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독액으로 빙판 된 길 녹이고 치우고 … 혹한 속 밤샘 사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구제역이 전국으로 확산돼 비상인 가운데 본사 신진호 기자(오른쪽)가 12일 오후 대전과 충북의 경계인 현도대교에서 공무원, 주민과 함께 길 위에 얼어붙은 소독액을 삽으로 치우고 있다. [김성태 프리랜서]

“신호등에 가서 차 좀 막아 주세요. 위험해 작업할 수가 없어요.”

 12일 오후 8시 국도 17호선 충북 청원군 현도면 양지리에 설치된 제25방역초소. 도로 한가운데서 얼음을 치우던 양지리 주민 한각수(58)씨가 다급하게 기자에게 소리쳤다. 신호등 아래로 뛰어가 “아저씨, 빨간 신호”라고 외치며 경광봉을 흔들었다. 하지만 차량은 신호를 무시하고 그대로 달렸다. 차량 운전자는 미안하다는 손인사도 없었다. 고급 외제차를 몰던 한 운전자는 창밖으로 피우던 담배를 던졌다. 차가 더러워져 기분이 나쁘다는 표시였다. “신호라도 제대로 지켜 주면….” 푸념만 나왔다.

 방역초소는 대전에서 청원군으로 진입하는 도로변에 서 있다. 차량 소독장치는 초소 앞 2개 차로에 설치됐다. 초소 앞 30m 지점 신호등 아래에는 방역을 알리는 입간판 두 개가 세워졌다. 중앙분리대와 도로 오른편엔 경광봉 두 개가 밤새 불을 번쩍였다. 소독액을 분사하는 차량 소독장치는 ‘∪’자 모양의 호스다. 도로 양 옆쪽과 바닥에 14개의 구멍을 뚫어 주유소의 자동세차기처럼 작동했다. 차량 외부와 바닥까지 모두 소독하기 위해서다. 멀리서는 시원한 분수터널처럼 보인다. 낮에는 소독액이 갓길로 흐르지만 밤이 되면 도로에 떨어져 얼음으로 변했다.

 충북도 내 216개 방역초소는 하루 3교대로 운영된다. 공무원 2명과 마을 주민 1명 등 3명이 1개 조다. 충북도는 10일부터 구제역이 발생한 4개 시·군 8개 초소에 매일 48명의 직원을 지원하고 있다. 기자는 충북도 세정과 안석영(50) 팀장, 서민숙(40·여)씨와 조를 이뤄 오후 5시부터 이튿날 오전 1시까지 청원 25초소에서 근무했다. 서씨는 초소 안에서 8시간 내내 자리를 뜨지 못하고 차량 소독장치를 작동했다. 신호등을 지켜보다 차량이 올 때는 켜고 지나가면 껐다. 기자는 물론 안 팀장과 서씨 역시 초소에 오기 전까지 자동으로 작동되는 줄 알았다.

 안 팀장과 한씨, 기자는 8시간 내내 도로가 빙판이 되지 않도록 얼음을 깨고 염화칼슘을 뿌렸다. 노즐에 뜨거운 물을 부어 얼어붙은 노즐 구멍을 녹였다. 깬 얼음은 넉가래로 긁어 도로 밖으로 퍼냈다. “이쯤이면 괜찮겠지” 하고 돌아서면 도로는 금세 얼음판이 됐다.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한 20여 차례의 삽질이 허무했다. 오후 10시가 지나면서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떨어지자 작업은 더 힘들었다. 장갑을 두 개나 꼈지만 손가락 끝이 얼 지경이었다. 허리도 아팠다. 얼굴도 얼어 감각이 없었다. 초소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손발을 녹였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도로가 계속 빙판으로 변해서다.

 작업을 하면서 멀리서 다가오는 불빛만 봐도 불안했다. 초소 10m 앞에는 5㎝ 높이의 과속방지턱이 설치됐지만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리던 운전자들은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았다. ‘이러다 사고라도 나는 게 아닌가’라는 걱정이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얼음은 삽으로 내리쳐야 겨우 깨질 정도로 단단해졌다. 얼음을 깨는 작업은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진 40초 안에 끝내야 했다. 운전자들이 신호만 제대로 지켜 주면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러나 신호를 지키는 운전자는 절반이 안 됐다. 초소에 내걸린 근무수칙 여섯 가지 중 첫째가 ‘교통사고 주의’였던 게 이해가 갔다.

 13일 0시40분. 다음 근무자인 회계과 김만회(50)·윤기호(37)씨가 도착했다. 안 팀장은 “적색 신호라고 해서 무작정 도로에 나가면 안 된다. 차량이 오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안 팀장은 “힘들지요. 그렇지만 고통에 신음하는 축산농민을 지켜만 볼 수 없지 않습니까. 구제역을 막기 위해 이 정도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청원=신진호 기자
사진=김성태 프리랜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