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5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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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클레멘타인 18

캄캄한 샹그리라를 내려다보던 지난 밤, 허망하게 소멸됐다고 여겼던 말굽이 손바닥 안에서 다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부르르 한 차례 떨면서 명안전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소나무 그늘 속 명안전은 잠잠했다. 등 뒤에서 플루트 소리가 났다. 노래를 끝낸 애기보살이 이번엔 플루트 연주를 시작했나 보았다.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사장을 향한 분노였다. 미소보살이 가운을 입혀줄 때의 조는 듯했던 이사장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사장은 애기보살이 노래와 춤을 끝내기도 전에 잠들고 말았던 것 같았다. 감히, 라고 나는 생각했다. 요정 같은 애기보살의 춤과 노래를 앞에 두고 감히, 어떻게 잠들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 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내가 점심을 먹는 동안 정문을 지키는 건 주로 노과장이었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주차장에 막 닿고 있는 차는 302호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낯익은 BMW302였다. 정보고등학교 여학생이 302호실에서 반라의 상태로 투신한 사건 이후 프로그래머는 뻔질나게 명안진사를 드나들었다. 여학생은 앉기는커녕 말조차 할 수 없는 장애자가 되었다. 프로그래머가 곧 풀려날 수 있었던 배경에 이사장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건 샹그리라에 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전에도 여학생을 가끔 데려온 상습범인데, 아무 죄도 없다니 말도 안 돼요.”라고 202호실 슈퍼마켓 젊은 남자가 말했고, “증거 없이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요 !”라고 207호실 젊은 순경이 힐난했다.

말은 그랬지만 젊은 순경도 심증만은 확실히 갖고 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과묵한 사람이었다. “저런 새끼, 이사장 할애비가 감싸더라도 언젠간 반드시 걸리게 돼 있어!” 젊은 순경이 돌아서며 혼잣말로 씹어뱉었다. 나만 겨우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였다. 그 말 때문에 나는 그의 감춰진 분노를 알았다. 암튼 문제의 사건 이후 프로그래머는 자연스럽게 이사장의 핵심심복이 되었다. 이번 주만 해도 명안진사에 벌써 여러 번째 하는 발걸음이었다.
“아니 저것은…….”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프로그래머의 손을 잡고 차의 뒷좌석에서 나온 것은 여린이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디자인된 하얀 한복 위에 붉은 장삼, 혹은 당의를 걸치고 있었으며, 정갈하게 쪽찐 머리 위로 장삼보다 더 붉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챙이 긴 모자였다. 나는 숨을 데도 없어서 어정쩡하게 선 채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애기보살의 플루트 연주는 오로지 해맑은 하늘의 소리로 태산준령을 막 넘고 있었다. 그녀가 한손으로 모자챙을 가볍게 쥔 채 플루트 소리를 좇아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딱 마주 선 형세였다. 정면으로 떨어지는 정오의 햇빛이 붉은색은 더 붉게 흰색은 더 희게 드러냈다. 그녀의 손을 잡은 프로그래머가 뭐라고 말했던가 보았다. 그녀는 이를 드러내고 소리 없이 웃었으며, 곧 모자를 벗어들고 심호흡하는 자세를 취했다. 명안진사의 하늘과 바람을 온몸으로 느껴보려는 듯했다. 그것은 차라리 이 세상을 넘어선 우주 바깥의 여리고 애틋한 정경 같았다.

그녀가 이윽고 이쪽 편을 향해 발걸음을 가볍게 내디뎠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얼른 건물 옆으로 몸을 숨겼다. 프로그래머가 나를 본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햇빛이 그녀의 발걸음에 쫙 갈라졌다. 무한한 슬픔이 그 순간 나를 사로잡았다. 이유도 없고 단계도 없고 근원도 없는 슬픔이었다. 의식할 새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짐짓 돌아서서 주차장 쪽을 멀리 우회해 걷기 시작했다. 햇빛을 가르면서 걷지 않는 것처럼 걷는 그녀를, 더 이상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플루트 소리가 역시 나의 귀를 찢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가 그랬듯이 맑은 플루트 선율이 갑자기 슬픔이 되어 내 귀를 찢어발겼다. 운악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내 뺨을 스쳤고, 잔설이 버석거리며 내 신발을 감쌌고, 마른 풀들이 내 종아리에 자꾸 감겼다. 바람은 슬픔이 되어 나의 뺨을 찢었으며 잔설은 발바닥을, 마른 풀들은 어김없이 나의 종아리를 찢었다.
얼어붙은 연못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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