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상원 “정부지원 받는 연구자라면 미국사 존중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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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지나가는 인물로 묘사될 뿐입니다. 미국 헌법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대불황은 세 차례나 언급됩니다.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에 대해 배우지 않게 됩니다. 전 세계를 보다 낫게 만든 미국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1995년 1월 18일 미 상원에서 슬레이드 고튼(Slade Gorton·워싱턴) 의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역사학계·교사 등이 정부 지원을 받아 만든 ‘미국 역사표준서’에 대한 비판이었다. “매카시즘(반공산주의)은 19차례나 언급하면서 (미국이) 자유국가의 방패가 되고자 했던 냉전의 본질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는 역사표준서가 반미·반서구적이라고 비판했다.

 90년대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역사표준서 논쟁’의 한 장면이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논쟁이다. 조지 워싱턴을 이승만 전 대통령, 미국 헌법을 제헌헌법으로 바꿔놓는다면 말이다. 2004년 10월 시작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논란’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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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도 유사하다. 미국에서도 학생들의 근현대사 지식이 형편없다는 자성이 일었고 조지 H W 부시(George H. W. Bush) 대통령이 역사교육 드라이브를 걸었다. 역사 등 5개 과목에 대한 표준서를 개발하고 학업 성취도 평가에 반영하도록 했다(미국2000). 우리도 김영삼 정부 시절 근현대사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고 97년 근현대사 과목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논란을 키운 건 ‘내용’이었다. 미국에선 보수·진보 성향의 학자·교사들이 머리를 맞대 표준서를 만들었다. 하지만 시대상황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60년대 이래 미국 학계에선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구호로 내건 이른바 수정주의 사관이 유행했다. 여성·노예·노동계급에 대한 연구가 붐을 이뤘다. 탐라대 정경희(국제지역학) 교수는 “자국사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전통적 역사관과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 교과서도 유사한 과정을 거친다.

 교과서 내용을 놓고 한·미 양국 모두에서 거센 논란이 일었다. 정치권도 가세했다. 의회와 국회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하지만 결론은 달랐다.

 고튼 의원이 문제 제기한 그날 미 상원은 99대 1로 표준서를 ‘비토’했다. 사실상 여야 만장일치였다. “정부 지원을 받는 연구자들은 세계 자유와 번영을 증진시킨 미국 역사에 대해 존중해야 한다”는 권고까지 했다. 이후 중립적 단체가 나서서 표준서를 재검토했고 96년 4월 개정안을 내도록 했다. 기존 표준서에 반대했던 인사들도 개정표준서에 합격점을 줬다. 18개월간의 역사 논쟁이 종결된 순간이었다.

우리는 6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논쟁 중이다.

◆특별취재팀=배영대·고정애·천인성·박수련·심서현 기자, 뉴욕·베이징·도쿄 정경민·장세정·박소영 특파원 신창운 여론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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