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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View 최영미의 심플 라이프] 장어초밥이 ‘장어구이 욕망’ 대신할 순 없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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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면

나는 연말연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춘천에 처박혀 조용히 지내는 내게도 출판사에서 보내는 송년회와 문학상시상식 초대장, 대학동문회의 신년모임을 알리는 e-메일이 날아오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사교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서로 술을 권하는 떠들썩한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아, 여럿이 모이는 자리를 꺼렸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알려면 휴대전화 뚜껑을 열어야 하는 내가 어떤 특정한 날을 기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춘천에 살면서 더 게을러져, 누군가와 시간 약속을 정하면 그 순간부터 나가기가 싫어 몸이 뒤틀린다. 아침부터 서둘러 일어나 씻고 밥 먹고 기차 시간표를 들여다보며 늦지 않으려 동동 뛰는 내가 싫다. 애인을 만나러 갈 때는 물론 이 모든 준비가 즐거우리라. 그와 헤어지고 벌써 십 년, 성탄절과 연말을 나 혼자 보냈다. 아주 혼자는 아니었으니, 마침 크리스마스 전날에 태어난 조카와 밥을 먹으며 생일선물을 건네고 돌아서면, 한 해가 갔다.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의 식당에 마주 앉아 그새 훌쩍 커버린 아이를 흐뭇하게 들여다보며, 고단했던 2010년을 잊었다. 그리고 춘천으로 돌아와서 쉬려고 누웠는데, 경비실에서 택배를 찾아가라고 난리다. 올해도 아나운서 이금희 님이 보낸 자연산 귤 상자. 고마운 마음으로 상자를 열어 배낭에 귤을 옮겨 담고, 경비아저씨에게도 얼마간 드렸다. (금희씨, 괜찮지?)

 아, 벌써 31일인가. 언제부터인가 한 해가 넘어가는 엄숙한 시간을 모르고 지나친다. 젊어서 나는 12월 31일 저녁에, 달력이 넘어가는 밤에 술을 마시든 맨 정신이든 또렷이 깨어 있었다. 밀린 일기를 몰아서 쓰며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의 결의를 다졌었다. 오늘부터 담배를 끊는다든가, 여름까지 장편소설을 완성하겠다든가 따위의 구태의연한 각오를 올해는 끼적이지 않았다. 헛된 맹세로 가득한 일기장을 펼쳐들 때마다 상처받느니 차라리 아무런 결심도 새기지 않는 게 마음이 편했다.

 자정이 지난 새벽에, 텔레비전에서 보신각 종소리를 들었다. 서울의 종각에서, 뉴욕의 광장에서 서로 얼싸안고 ‘즐거운 새해’를 외치는 사람들. 그들처럼 나도 단순하게 행복해지고 싶다. 먼 나라의 따뜻한 바닷가에서 새해를 맞고 싶어, 신정은 포기하고 구정에라도 내 꿈을 이루려 인터넷으로 유럽의 호텔을 검색하며 나의 2011년이 시작되었다. 컴퓨터와 씨름하다 지쳐, 이미 여명이 깃든 창가에 앉아서 나는 생각한다. 장소를 바꾼다고 당장 내가 달라지지는 않으리라. 내 몸이라도 덜 피곤하게 생활방식부터 고쳐 나가자. 새해에는 한번 시작한 일을 되돌리지 말자. 한번 구입한 물건은 절대로 반품하지 말고, 교환하거나 환불하려 짐을 싸 들고 서울로 가지 말자. 그동안 돈을 아끼느라 내 소중한 시간을 어지간히 낭비했다. A를 원하는데 너무 비싸서 B를 구입한다. 그리고 며칠 못 가 후회하며 B를 반품하고, A를 사는 게 아니라 A보다 질이 약간 떨어지지만 값이 덜 나가는 C로 타협하는 식이다. 장어구이를 먹고 싶은데 장어덮밥을 시켰고, 장어덮밥도 비싸서 백화점 지하의 식품매장에서 낱개로 포장된 장어초밥을 샀다. 민물이 아니라 바닷장어라서 맛도 없고, 냉장고에서 금방 꺼내 밥알도 꼬들꼬들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래 봤자 1만원 차이인데. 나의 식욕을 돈에 맞춘 오후에는 늘 배가 고파, 허전함을 달래려 다시 단호박이나 다른 군것질거리에 손을 뻗쳤다. 끼니를 때우려 내 지갑에서 나간 비용을 나중에 합산하면, 애초에 내가 원한 장어구이값과 비슷하거나 때로 그보다 비쌌다! 이건 말도 안 돼. 식당가를 빙빙 돌며 내가 버린 시간과 에너지를 합하면 엄청난 손해다. 그러니 ‘장어’를 머리에서 지우지 못한다면, 장어를 먹어야 한다. 한번 일어난 욕망은 결코 줄어들지 않으니, ‘욕망불변의 법칙’이라 이름 붙여도 좋겠다. 여행하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길거리에 돈을 뿌리고 다니면서 내 몸에 직접 닿는 옷이나 화장품을 사는 데 나는 인색했다. 지난 1년간 물건을 반품하려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버린 교통비만으로도 장어구이를 두 번 아니 세 번 포식하고도 남겠다. 창가의 근사한 전망을 즐기며 서비스로 나오는 달콤한 디저트에 입맛을 다셨으리. 멍청한 짓일랑 그만두고, 앞으로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입고 싶은 것을 입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야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사랑하랴. 내가 꿈꾸던 지중해, 저 바다가 언제까지 푸르게 반짝일지 누가 알리요.

시인 최영미

1961년 서울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 미술사 석사. 19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2005년 첫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 2006년 시집 『돼지들에게』로 이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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