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찍으면 5배 횡재, 복주머니 후쿠부쿠로 ‘묻지마 쇼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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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호 04면

폭풍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새해의 시작과 함께 일본 각 백화점과 쇼핑센터의 ‘하쓰우리(初<58F2>り)’ 세일도 시작됐기 때문이다. 1월 2일 도쿄 긴자 미쓰코시백화점에서 만난 풍경은, 일본에 와서 지금까지 본 모든 장면 중 가장 활기찬 것이었다. 영업 시작 전부터 백화점을 둘둘 감으며 줄을 선 1500여 명의 사람, 문이 열리자 전력 질주로 매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록그룹 공연장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던 그들이 이곳에선 “여기요!” “이거요!” 마구 소리를 지른다. 일본의 신년세일엔 그만큼 특별한 게 있었다. ‘6만9900원에 10개월 할부, 자동주문전화 5000원 할인’보다 훨씬 강력하게 ‘지름신’을 부르는, 바로 새해맞이 ‘후쿠부쿠로(福袋·복주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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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초 일본 백화점이나 가게들은 ‘후쿠부쿠로’라고 쓰인 봉투 안에 각종 물품을 임의로 넣어 입구를 봉한 뒤 판매한다. 봉투 하나에 1000엔부터 수십 만엔짜리까지 있는데, 보통 3~5배가 넘는 가격대의 물건들이 들어 있다. 내용물을 보지 못하고 사는 만큼 후쿠부쿠로로 1년의 운을 점친다는 의미도 있다. 원래 에도시대 상인들이 남은 물건을 한 봉투에 담아 싼 가격에 팔던 게 유래로, 현대적 의미에서의 후쿠부쿠로는 1907년 현재의 마쓰야백화점에서 시작됐다. 지금은 웬만한 가게라면 다 후쿠부쿠로를 만드는데 옷·화장품·액세서리 등은 물론이고 카메라·프린터 등이 들어 있는 ‘가전 후쿠부쿠로’도 인기. 스타벅스·애플 같은 미국 기업들도 일본에서는 후쿠부쿠로를 내놓는다.

어떤 백화점이 기발한 아이디어의 후쿠부쿠로를 내놓느냐의 경쟁도 치열하다. 올해는 요리학원·에스테틱 등 체험형 후쿠부쿠로가 인기였다고 한다. 280만 엔짜리 순금 료마상 후쿠부쿠로, 180만 엔짜리 남극 크루즈 여행 후쿠부쿠로 등 초고가 상품들도 등장했다. 올해 ‘후쿠부쿠로의 종결자’는 소고세이부백화점이 내놓은 ‘궁극의 수퍼에코카 후쿠부쿠로’인데 이 상품은 일본에서 12대만 한정 판매되는 전기자동차(EV) ‘테슬러 로드스타’와 최고급 리조트 여행을 세트로 만든 것으로 가격은 무려 1850만 엔.

후쿠부쿠로는 일본의 버블경기에 딱 들어맞는 쇼핑문화였다. ‘내용물을 모른 채 일단 산다’는 건 ‘필요에 의한 소비’가 아니라 ‘소비를 위한 소비’의 궁극적인 형태다. 하지만 경기가 악화되고 소비 성향도 위축되기 시작한 90년대는 비닐가방 등에 넣어 내용물을 살짝 공개하는 ‘반칙 후쿠부쿠로’도 늘어났다. 10대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쇼핑몰 ‘시부야109’에서는, 후쿠부쿠로 쇼핑을 마친 소녀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들을 서로 바꾸는 ‘후쿠부쿠로 교환회’가 열리기도 한다.

올해 일본 백화점들의 후쿠부쿠로 및 신년세일 실적은 꽤 좋았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미쓰코시 긴자점은 1월 2~3일 매출이 지난해의 1.5배로 늘었고 마쓰야·프랭탕백화점 등도 3~5%포인트 정도씩 상승했다. 이에 따라 드디어 개인 소비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긍정적 예측도 나오고 있다. 반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동안 너무 절약했으니 이때만이라도 맘껏 써 보자는 생각일 뿐.”

얇은 지갑 탓에 망설임이 길다 보니 사고 싶던 후쿠부쿠로를 몇 개 놓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봉투 안엔 내게 꼭 필요한, 아름다운 디자인의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을 것만 같다. ‘내년에는 꼭!’이라며 수첩에 가게 이름을 적어 놓는다. 가산 탕진의 지름길이라는 ‘후쿠부쿠로 재수생’의 길로 막 접어드는 참이다.


이영희씨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현재 도쿄 게이오 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하고 있다.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을 학업으로 승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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