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미제사건 171건 한 사람에 떠넘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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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간격으로 성남과 인천에서 동시에 절도?'

경찰이 절도 피의자를 협박하고 회유해 미제사건 171건을 뒤집어 씌운 사실이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같은 날 10분 간격으로 경기도 성남과 인천에서 발생한 불가능한 사건도 뒤집어 씌웠다.

수원지법 제4형사부(재판장 김경호)는 7일 절도 176건에 4700만원을 훔친 혐의로 구속된 뒤 보석으로 풀려난 길모(32)씨의 항소심에서 5건의 혐의만을 인정,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를 선고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길씨에게 적용된 혐의 가운데 지난 2009년 6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한 호프집에서 현금 6만원 등 두 차례에 걸쳐 모두 21만원을 훔치고 세 차례 미수에 그친 혐의만을 인정했다. 나머지 혐의는 모두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사건의 시작은 분당경찰서가 2009년 9월 길씨에 대해 125건의 절도혐의로 구속하면서 부터다. 이에대해 수원지법 성남지원 1심 재판부는 같은해 10월 길씨의 혐의를 모두 인정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경찰은 길씨를 구속하는 과정에서 “강도사건현장 CCTV에 찍힌 범인이 너와 비슷하다. 시인하면 집행유예나 징역 6개월 정도 살면 나올 수 있게 해주겠다”고 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길씨는 "중·고교 시절 행동·정서 장애를 겪었고 ‘도벽’으로 보호처분을 받은 적이 있어 '강도 용의자보다는 절도범이 낫다'고 여겨 1건을 인정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경찰은 “성남에서 발생한 절도 미제 사건을 네가 다 가지고 가라”며 “만약 부인하면 아버지의 직장으로 끌고 가 망신을 주겠다”고 협박, 무려 125건을 인정하게 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구나 경찰은 1심 선고뒤 길씨에 대해 인천지역 미제사건 51건도 추가해 모두 176건, 절도액은 4700만원으로 부풀렸다. 담당 경찰관이 길씨에게 찾아가 “인천의 절도 사건에서 네 유전자가 나왔다”며 자백을 요구했고 길씨는 또다시 시인했다.

그러나 사건을 송치받은 수원지검 형사3부 최준호 검사는 성남과 인천에서 같은날 같은 시간대에 10분 차이로 길씨가 범행을 지지른 것으로 나타나는 등 혐의의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을 이상하게 여겨 추궁한 결과 허위자백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검찰은 길씨의 공소장을 변경했고, 재판부는 길씨의 혐의 5건만을 인정,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김영준 차장검사는 “사건을 송치받은 담당 검사가 의문점이 많아 재수사한 끝에 피고인이 누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공소장을 변경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건을 심리한 김경호 부장판사는 “절도사건의 경우 피고인의 자백과 피해자의 진술이 있으면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며 “길 피고인은 그러나 2심에서 억울함을 호소해 지난해 5월 보석으로 석방했고 재판과정에서 상당부분 알리바이를 입증해 검찰이 기소한 5건만을 토대로 선고했다”고 설명했다.

중앙일보 디지털뉴스룸=백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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