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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뎐〉의 감독 임권택

중앙일보

입력

현재 촬영 중인〈춘향뎐〉은 임권택 감독의 97번째 작품입니다. 조상현의 창본 춘향가를 원안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는 시대적, 세대적인 감각에 따른 새로운 해석이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감독은 고집스러우리만치 원작 그대로를 철저한 고증에 입각해 만들 것을 원칙으로 고수하고 있지요.

X세대에 이어 N세대라는 비즈니스 관점에 입각한 마케팅식 세대 구분법이 사회를 횡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고풍스런" 의도는 다분히 영화계의 의구심을 자아내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감각적인 멜로, 뮤직비디오같은 액션물, 그리고 유사 헐리우드 영화가 "대박"이 터지게 하는 상황에서 더욱 그렇지요.

하여튼 임권택 감독은 조상현의 창본 춘향가를 배경에 깔고 영화를 힘있게 찍어 나가고 있고, goCinema는 그런 그를 만나 보았습니다. 아직 영화가 완성되지 않은 마당에 이런 인터뷰는 자칫 사족같은 느낌을 줄지도 모르지만,〈춘향뎐〉에 대한 이해로 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터뷰는 10월 26일 아침에 남원 광한루 밑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새로운 작품으로 〈춘향뎐〉을 선택한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고 있다.

세상은 세계 전체가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화"라는 구호가 나오는데, 이는 자칫 "서구화"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게 되어서는 경쟁에서도 탈락되고, 문화적으로 식민지화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우리의 정체성과 개성을 담고, 그것을 살릴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토양과 정서를 다룬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춘향뎐〉을 영화화하겠다는 구상은 언제 한 것인가?

〈서편제〉를 찍을 때부터 언젠가 꼭 "춘향전"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다른 작품을 만들기도 했고, 그 후에도 다른 소재들을 찾아 보았지만, 이번처럼 "춘향전"이 내 안에서 밀고 올라온 적이 없었다.

-이번 작품에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새로운 해석같은 것은 없는가?

사실 "춘향전"에서 결말이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본래 "춘향전"은 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판본만 해도 80여본이 있다. 이것은 곧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는 의미다. 나는 작품 안에 그 시대 민중들의 잠재적인 의지가 작품 안에 충분히 있다고 본다. 그리고 "춘향전"이 그러한 민중들의 의지가 녹아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도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춘향전"에는 당시 전통문화가 광범위하게 수렴되어 있다. 관료, 중인, 기생과 천민의 생활상은 물론, 양반들의 풍류 풍속까지. 거기에 음식이나 춤, 의상은 생활상을 표현해 주는 수단이고. 판소리를 들어 보면,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 당시 민중들의 정서가 잘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조상현 창본 춘향가를 영화에 기본 사운드로 깔고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이는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뮤직 비디오라는 이야기도 하던데...

우리 영화에서 판소리는 시나리오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영화의 음악이기도 하다. 아울러 배우들의 연기나 영상미학적인 측면과도 하나가 되어 영화 자체를 만들어 가는 수단이기도 하고.

판소리는 일반 대중과는 꽤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영화에서도 판소리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영화에서 판소리의 멋과 감동을 담고 싶었다. 뮤직 비디오는 아니며,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판소리와 화면이 하나가 되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당시 시대의 개성이나 풍류 같은 요소도 잘 담겼으면 한다.

-25일에 찍은 장면들은 모두가 군중 씬(mob scene)인데, 이런 장면을 찍을 때 어려운 점이나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 엑스트라들의 동선인가?

몹 씬에서 중요한 것은 감독이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하는 부분이다. 즉 그 화면에 심고자 하는 것을 감독이 명료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제 찍은 장면(어사출두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관료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이 스스로 부패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죽었구나하는 느낌, 그래서 당황하고 놀라 갈팡지팡하는 것이 중점으로 보여져야 했다.

어제 찍은 몹 씬은 250여명 정도되지만 우리 영화에서 더 큰 장면도 있었다. 변학도 부임 장면이 그것인데, 그 때는 350여명 정도 동원되었다. 사실 몹 씬에서 소리나 리듬, 그리고 사람들의 동선을 맞아 떨어지게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장중한 느낌을 내는 것이다.

-군중 씬을 찍을 때,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가?

사실 그것은 취향이나 스타일에 관계된 부분이다. 감독의 개성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고. 나는 대작을 많이 찍어 본 경험이 있어 비교적 몹 씬을 수월하게 찍을 수 있는 것 같다. 이번에는 〈서편제〉의 경험이 도움이 되기도 했는데, 그런데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이제까지 찍은 영화 중 고쳐찍은 부분이 가장 많다.

-이번 작품을 찍으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담아 내고자 했던 부분이 제대로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 어렵다. 실제로 5월달 동안 찍은 분량은 전부 다시 찍었다. 게다가 이 작품에는 각계에서 무상으로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제작 스탭 모두가 작품에 집중하며 정성을 보이고 있다.

실례로 영화 속에 나오는 병풍, 동헌 현판의 글씨 같은 것은 모두 직접 써 준 것이다. 어제 촬영에서는 나도 못보고 지나친 것을 스탭 중 하나가 지적해서 발견하기도 했고, 이렇게 모두가 정성을 쏟고 있다. 많은 이들의 정성이 쌓이면 영화가 좋아지는 법인데, 거기에 나만 잘하면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판소리를 배경음악처럼 사용하는데,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듣는 음악은 무엇인가?

그냥 듣는다. 이미자 노래 같은 것도 그렇고. 그런데 판소리를 들으면 저 바닥에서 울리는 게 있다. 사실 판소리에서는 "귀명창"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소리꾼이 소리를 잘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제대로 들어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 아마 일반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것도 이런 탓이 있을 거다.

하지만 〈춘향뎐〉은 한 번 들으면 관객들에게 그 소리의 멋과 감동이 바로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영화로 만들고 싶다.

[사족]

임권택 감독과 본 기자가 만나 인사를 나누면서 명함을 건넸습니다. 그런데 임권택 감독은 명함을 받으면서 특유의 말투로 "아 인터넷, 이거 무지하게 어려운 건데..."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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