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공연서 미사일·군인들 빼라” 김정일, 미국·한국 의식해 수정 지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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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방북 때 기념촬영을 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왼쪽)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북한은 이들이 16일 오찬을 함께했다고 발표했으나 공개된 미 외교전문엔 만찬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중앙포토]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외교전문에 따르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미국인들이 집체극 아리랑 공연에서 미사일 발사 장면 등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일부 내용을 미국 취향에 맞게 고쳤다”고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게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또 아리랑에서 한국인들이 집단으로 군인이 출연하는 장면을 싫어한다고 해 학생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바꿨다고 했다. 현 회장과 면담한 뒤 그 내용을 정리해 미 국무부로 보낸 캐슬린 스티븐스(Kathleen Stephens) 주한 미국 대사는 “현 회장이 관찰한 김 위원장의 건강상태는 마지막에 첨부한 노트를 참고하라”고 전문에 덧붙였다. 이 내용은 위키리크스에선 공개되지 않았다. 다음은 주요 내용.

 ◆"난 여전히 살아있다”=김 위원장은 “왜 이명박 정부는 대북관계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전 정권 관리들을 활용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남북관계를 운전하던 통일부가 밀려나고 북한을 잘 모르는 외교부에 운전석을 빼앗겼다”며 불평했다.

김 위원장은 양측 간 신뢰의 부족이 남북 관계의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한국의 현 (이명박) 정부가 자신이 서명한 6·15, 10·4 선언의 정신을 알아주길 원했다. 그는 당시 합의서에 서명한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은 고인이 됐지만 “난 여전히 살아있다”며 합의 내용이 존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성공단 잠재력 왜 인식 못하나”=김 위원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와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그들의 ‘의리’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명박 정부는 개성공단의 잠재력을 인식하지 못하나”라고 물었다. 현 회장은 이 대통령이 개성공단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고 정권 초기 나들섬에 새로운 경협 단지를 구상했지만 북한 노동자의 이주가 어려워 단념하기도 했었다고 답했다. 김 위원장이 남한 대기업이 개성공단에 투자하기를 꺼리는 이유를 물었다. 현 회장은 “한국의 대기업 대부분이 미국과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지금처럼 경색된 북·미 간 분위기에서 양국을 상대로 동시에 사업을 펼치기엔 어려운 점이 많다”고 답했다.

 ◆“핵 개발은 미국에 보여주기 위한 것”=현 회장은 김양건 당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현 아태평화위원장)과도 면담했다. 김 부장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남한에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며 “북한은 작지만 강한 나라라는 것을 미국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측이 먼저 식량원조 제안해주길”=김 부장은 그해 7월 30일 북한에 납북된 연안호 어부들이 곧 송환될 것이라며 “남북이 송환 협상을 할 때 한국 측이 먼저 식량원조를 제의해 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현 회장에게 전했다. 현 회장이 남한 당국에 이를 설명할 땐 현 회장 자신의 아이디어라고 해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현 회장이 식량난이 심각한지 묻자 김 부장은 “올해는 무덤 수준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대북사업 관련=현 회장의 방북 목적은 사업 중단으로 파산 지경에 빠진 금강산 관광의 빠른 재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현 회장은 “북한보다 남한에서 더 많은 장애물에 부딪히고 있다”고 불평했다. 정부 간 대화 없이는 그가 평양에서 맺은 합의의 실행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탄식했다.

이충형 기자

현대그룹 입장

현정은 회장은 스티븐스 대사를 방문해 결코 우리 정부에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으며, 당시 북한 측이 다소 유화적이고 우리 정부가 강경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말했을 뿐이다. 통역상 오류로 진의가 잘못 전달된 것 같다. 당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이 “현 회장이 정부에 식량원조를 제의해 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김양건 부장이 아니라 당시 원동연 아태평화위원회 실장이 말한 것이다. 이처럼 당시 스티븐스 대사에게 전한 대화의 상당 부분이 사실과 다르게 왜곡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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