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11 문화 파워 ① 소설가 김연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새해 첫날 아무도 걷지 않은 흰 눈 위를 소설가 김연수씨가 걸었다. 평소 그가 매일 달리기를 하는 경기도 일산 호수공원에서다. 꽝꽝 언 호수 얼음장 위에 새로운 발자국을 냈다. 그는 “올 한 해는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 즉 소설 쓰기에 좀 더 집중하겠다”고 했다. [최승식 기자]


소프트파워 시대다. 그 중심에는 문화가 있다. 경제·군사력 등 하드파워 못지 않게 삶을 풍요롭게 하는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2000년대의 새로운 10년을 여는 올해, 한국 문화계의 흐름을 주도할 문화·예술인을 차례로 만나본다. 그 첫 번째로 현재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소설가 김연수씨를 초대했다.

지난 연말 문학 독자, 아니 지루한 한파를 견딜 묘책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즐거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새해 마흔하나가 된 소설가 김연수가 새 책을 자그마치 세 권이나 쏟아냈다. 1997년 작 장편 『7번 국도』를 전면 개작한 『7번 국도 Revisited』(문학동네), 소설 명문장·명시 소개 칼럼을 묶은 『우리가 보낸 순간·시』 『우리가 보낸 순간·소설』(마음산책)이다. 김씨가 꼽는 명문장, 그것이 불러 일으킨 김씨 내면의 감흥을 엿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보다 관심이 쏠리는 쪽은 아무래도 『7번 국도 Revisited』다. 무엇보다 십여 년 세월을 사이에 둔 두 김씨의 차이를 맛볼 수 있어서다.

 김씨가 누군가. 호를 ‘다산(多産)’, 또는 ‘다상(多賞)’으로 해야 한다는 인터넷 유머가 떠도는 작가다. 그만큼 그는 94년 등단 이후 누구보다 부지런히 작품을 써왔고, 상도 많이 받았다. 게다가 폭넓은 고정 독자층이 있다. 2009년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4만 부 가량 팔렸다. 작품성·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손에 넣었다.

 새해 벽두, 김씨를 만났다. 고향인 김천에 내려가겠다는 사람을 붙잡았다. 1일 오전 경기도 일산 작업실 부근에서 만나 근황, 새해 소망, 위기의 남북 관계에 대한 단상 등을 들었다. 꽁꽁 언 호수공원으로 데리고 가 얼음장 위에서 사진을 찍었다.

 호수공원 옆 오피스텔 작업실은 심심할 정도로 깔끔했다. 21인치 모니터의 아이맥 컴퓨터, 달리기 광인 그가 아끼는 마라토너화 두 켤레, 최근 다시 연습을 시작한 통기타, 사놓고 읽지 못한 책 100여 권 등이 눈에 띄었다. 작업실 현관문 안쪽에는 열화당 사진문고 『낸 골딘』에서 뜯은 누드사진 등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상도 받을 만큼 받았고 독자도 있다. 소설가로서 더 올라갈 데가 없어 보이는데, 올해 계획이 있다면.

 “큰 결심은 없다. 다만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점점 분명해지는 것 같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보다 집중하자,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중요한 일? 물론 소설 쓰기다. 지금까지 소설 아닌 산문을 더러 썼는데 올해는 소설에 더 할애할 생각이다. 소설 쓰면서 계속 뭔가를 실험해 왔는데 지금은 머리를 쥐어짜는 고통 없이 소설 쓰는 게 가능할까, 그런 걸 실험하고 있다. 글쓰기의 일상화랄까, 매일 글을 읽고 소설을 쓰면서 그 과정에 더 집중한다고 할까, 아무튼 글 쓰는 일과 내 삶을 조금 더 일치시키고 싶다. 문학상을 받는 것은 원래 목표가 아니었다. 주니까 받는 거고 받으니까 기분은 좋은데, 정말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내 안의 욕망이나 기준에 비춰볼 때 아쉬운 경우가 많다. 지금도 어떻게 썼으면 좋겠다는, 소설의 모습은 있는데 막상 그렇게 쓸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새해 마음 먹은 작품이 있나.

 “2009년 계간지 창비에 연재했던 장편 ‘바다 쪽으로 세 걸음’을 내년 중에 완성할 계획이다.”

 ‘바다 쪽으로…’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스페인 신부를 만난 조선인 소년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소설이다. 형은 가톨릭 신부가 되고 동생은 상인이 된다. 연재하며 900쪽까지 썼고, 연재 없이 나머지를 전작으로 써 전체 3600쪽, 두 권짜리 장편으로 펴낼 계획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겠다는 건가.

 “대부분 임진왜란을 과거에 벌어져 끝난 일로 다룬다. 전형적인 역사소설 방식이다. 나는 우리 동시대의 감각에 맞게 현대적으로 쓰고 싶다. 내가 읽은 최신의 역사 연구 성과는 임진왜란이 세계적인 중개무역의 틈바구니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는 거다. 단순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일본의 한 장군이 미쳐서 중국을 점령하고 싶은 욕심에 벌인 전쟁이 아니다. 전세계의 은을 끊임 없이 빨아들이던 당시 중국에 일본의 은이 수출됐는데 포르투갈·스페인 상인들의 중개무역을 통해서였다. 이들이 이익을 너무 챙기자 일본은 중국에 직접 무역을 요청했으나 중국은 듣지 않았다. 일본이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조총을 전쟁에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임진왜란에 세계 경제적인 측면이 있었음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일본이 조총이 생겨 벌인 전쟁이 아니었다는 거다. 나는 역사소설도 지금의 관점에서, 다양한 최신 정보의 바탕 위에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작가의 역할은 필터링을 하는 편집자 가까운 측면이 있다. 자료를 모아 쓰기만 하면 어떤 기준으로는 표절이 된다. 작가의 강한 해석이 개입해야 현대소설이 된다고 본다. 그러려면 작가가 방대한 정보를 체화해서 마치 본 것처럼 써야 한다.”

 -정보를 체화하는 방법이 있다면.

 “감각적인 자료까지 챙겨야 한다. 가령 임진왜란 기간 중 특정한 그믐밤에 달빛이 어느 정도였는지 할 수 있는 데까지 알아봐야 한다. 주인공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쓰려는 당시에 대해 굉장히 풍부한 경험을 가진 어떤 사람이 되야 비로소 소설이 써진다. 장편을 쓸 때는 그런 과정에만 한 달쯤 걸린다. 요즘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소설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오전 9시쯤 작업실에 나와 오후 네다섯 시까지 작업한다.”

 역사소설이 김씨 소설의 한 갈래를 이룬다면, 당대의 현실에 대한 언급도 특징 중 하나다. 2007년 작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남한 학생 대표로 베를린에 파견됐다가 한국 학생운동 지도부가 와해되는 바람에 북한 학생 대표와 접촉하지 못한 채 오리알이 되는 인물이 주인공인 소설이다. 2009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단편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말미에 촛불 시위를 건드린다. 화제를 바꿔 극단으로 치달았던 지난해 남북관계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올해는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지난해 남북관계는 정말 최악이었다.

 “정부가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는 것인지 우려가 컸다. 사태에 끌려가선 안 된다.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해야 한다.”

 -상상력이라니.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사회 모든 구성원의 삶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흘 동안만 전쟁이 벌어져도 민간의 피해는 엄청날 것이다.”

 -6자 회담 재개 이야기도 나온다.

 “하느냐, 마느냐 두 가지 중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의 트라우마(심리적 외상)가 6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치유되는데 또 한 번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상처는 영영 회복 불가능할 것이다. 당장 초등학생인 내 딸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전쟁은 어떤 경우든 일어나서는 안 된다.”

 -소설가로서 보람이 있다면.

 “내 책을 읽으며 인생의 한 시기를 보낸 독자를 만날 때 가장 벅차다. 대학교 입학할 때 내 작품을 읽었는데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다 이별하고, 졸업 후 직장을 다니며 나의 다른 작품을 읽었다는 독자가 있다. 누군가의 인생에 내 책이 중요한 사물이 되는 것, 어떤 사람의 인생과 함께한다는 것은 너무 기분 좋은 일이다.”

 -당신에게도 그런 작가가 있나.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내게 그런 작가다. 그의 작품 중 『해변의 카프카』를 가장 좋아한다. 그 속에 변태적인 소년 하루키가 들어있다고나 할까.”

 -소설 말고 다른 계획은.

 “몇 년 전부터 알래스카로 오로라를 보러 가고 싶었다. 오로라를 보고 나서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이 많아 막연히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얘기하다 보니 이제는 정말 가야 할 것 같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김연수는=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93년 ‘작가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데뷔했다. 94년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가 작가세계문학상을 받으며 소설가가 됐다. 천재 예술가 이상(李箱)의 사라진 데드마스크의 행방을 쫓는 장편 『꾿빠이, 이상』, 1930년대 만주의 조선인 단체 민생단의 자중지란을 그린 장편 『밤은 노래한다』 등으로 주목 받았다. 방대한 자료조사와 유려한 문체로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꾸준히 탐구해왔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체라고 믿으며,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문학상 심사를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장편 『사랑이라니, 선영아』,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스무 살』 『세계의 끝 여자친구』 등이 있다. 황순원·이상·동인·대산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받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