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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가장 기억될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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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왼쪽 정렬 170이하 인물 이미지 ##

정진홍
논설위원

# 순간 : 어제 오전 7시부터 오늘 오전 7시까지 한 해를 넘기며 꼬박 24시간 동안 계속된 특별한 이벤트가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펼쳐졌다. ‘크리스천 마클레이 : 소리를 보는 경험’ 전에 선보인 세 가지 작품 중 하나인 ‘시계’를 통해 작가 마클레이는 분(分)·초(秒)를 다투는 순간을 모아 생을 짜깁고 삶을 자아냈다. 그는 시계가 등장하는 영화 속 장면들만을 모아 24시간의 흐름 속에 1분, 1초의 오차도 없이 꼼꼼하게 재편집했다. 그래서 그 영상물에 등장하는 시계의 시간이 그것을 보는 이의 현재 시간과 일치하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허를 찔린 듯’ 창의적인 작품이었다. 말 그대로 순간을 이어 붙여 삶을 교직해 낸 것이다. 이처럼 삶은 순간의 물방울이 모여 이룬 거대한 물살에 다름 아니다.

 # 하루 :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에서 어제 막을 내린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은 박태원의 동명(同名) 소설을 연극으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1934년 8월 1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30회에 걸쳐 연재됐던 이 소설은 말 그대로 하루 동안 경성(서울)을 배회하며 어슬렁거리는 소설가 구보씨, 곧 작가 자신의 일상을 담아낸 작품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대작 ‘율리시스’의 영향을 받은 듯하기도 하지만 박태원의 이 소설은 하루라는 일상의 가치를 주목한 최초의 우리 소설이 아닐까 싶다. 이것을 연출가 성기웅이 감각 있게 무대 위에 올려놨고 신문에 연재했던 소설의 마지막 게재 분을 구보 박태원의 차남(박재영), 차녀(박소영)와 예술가들이 낭독하는 의미 있는 이벤트도 선보였다. 사실 하루는 별 볼일 없는 듯 보이지만 삶은 결국 그 하루의 누적이요, 온축(蘊蓄)인 것이다.

 # 일년 :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는 지난해 12월 29일부터 어제까지 국립오페라단이 지난 한 해 동안 선보였던 작품과 앞으로 선보일 작품에 나오는 대표적인 아리아와 하이라이트만을 모아 만든 갈라 공연이 펼쳐졌다. 그것은 ‘이도메네오’로부터 ‘룰루’에 이르기까지 2010년 공연의 결산이었고 ‘투란도트’와 ‘파우스트’로 문을 여는 2011년 공연의 분명한 좌표 설정이었다. 한 편씩 올려질 때는 잘 몰랐는데 1년 단위로 묶어놓고 보니 국립오페라단과 이소영 단장의 예술적 투혼이 새삼 느껴졌다. 특히 이 단장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고집스럽다 못해 억척스럽기까지 한 예술혼이 확실한 결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삶은 1년 단위로 성적표를 받아 든다.

 # 평생 : 눈발이 날리던 지난해 마지막 월요일 오후 서울역 뒤편 서계동에 갔다. 서울역 대합실을 가로질러 옛 서부역 방면으로 나서자 소화아동병원 옆으로 온통 빨간색 칠을 한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로 (재)국립극단이 들어선 옛 기무사 수송부대터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원로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백성희 장민호 극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직 채 완성되지 않은 극장이지만 장민호, 백성희 두 원로배우가 그 무대 위에 섰다. 그리고 각각 연극 ‘파우스트’와 ‘달집’의 한 대목을 3~4분씩 독백했다. 장 선생은 86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또렷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파우스트가 됐고, 한 살 아래인 백 선생 역시 애절하고 한 많은 여인 간난의 넋두리를 온 몸으로 전했다. 두 분 모두 웬만한 사람들의 인생보다 더 길게 평생 연극의 외길을 걸어왔다. 삶은 그렇게 평생을 걸어온 길에 대해 반드시 보응(報應)한다.

 # 2011년 새해다. 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그 하루가 쌓여 일년이 지나며 또 새해를 맞았다. 누군가에게는 이 해가 삶의 첫해일 수도 있고, 결정적 전환기일 수도 있으며 또 이 생에서의 마지막 해가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순간, 하루, 일년, 평생을 잇는 시간 앞에 겸허하자. 마주할 순간마다 진실되자. 그 하루하루에 성실하자. 그래서 올 한 해를 내 평생에 가장 기억될 해로 만들자.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