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2) 싸움꾼 이승만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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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왼쪽)이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과 낚시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시점은 분명치 않다. 이 대통령은 밴플리트 장군과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등 미군 고위 지휘관을 자주 낚시에 초대해 대화를 나눴다. 승부사 기질의 이 대통령은 휴전협정 조인을 앞두고 워싱턴과 치열한 신경전을 펼쳤다. [중앙포토]


이승만 대통령은 투사(鬪士)였다. 내가 그 밑에서 육군참모총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의 대통령 연령은 이미 78세였다. 그런 고령(高齡)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투지(鬪志)는 식을 줄 몰랐다.

 육군참모총장을 두 차례 지내고, 그 중간에 155마일 휴전선을 모두 방어하는 한국 최초의 1야전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인물인가를 늘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역정(歷程)이 말해주는 그대로, 늘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위해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진정한 투사였다.

 대통령의 전성기는 대한민국이 김일성 군대의 남침으로 기우뚱거리다가 가까스로 그 참화(慘禍)에서 일어서는 순간부터 휴전을 맞이하는 과정까지였다. 그는 늘 활발하게 전선부대를 시찰하고, 힘이 닿는 껏 “북진해서 오랑캐를 몰아내고 통일을 이루자”고 외쳤다. 그리고 풍부한 학식을 발휘하면서 미군과의 교섭(交涉)을 주도했으며, 지칠 줄 모르는 정력(精力)으로 대한민국의 거친 건국사(建國史)를 써내려 가고 있었다.

 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 왕조의 개혁을 꿈꾸다가 중죄인으로 분류돼 7년 동안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이어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기간 내내 해외에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펼쳤다. 70을 넘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올라 건국의 줄기를 세우다가 공산 북한과 중국을 맞아 강력한 항쟁(抗爭)을 벌이고 있던 인물이었다.

1903년 한성감옥에서 복역중이던 이승만. 정부 전복혐의로 체포돼 1899년에서 1904년까지 5년7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중앙포토]

 대통령의 인생은 거의 모든 과정이 싸움으로 점철(點綴)돼 있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왕조 권력과 싸웠고,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항해 저항운동을 벌였고, 마침내는 공산주의와의 혈투(血鬪)에 나선 인물이었다. 그래서 나 아닌 남, 타자(他者)를 두고 벌이는 모든 싸움에 능한 편이었다. 아니, 능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고수(高手)라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1953년 4월 접어들어 서울에서는 휴전 반대 데모가 연일 이어지고, 스스로 기회가 닿을 때마다 “휴전은 없다. 북진통일이 우리의 목표”라고 외치고 다닐 때의 대통령이 고른 싸움 상대는 미국이었다.

 그와 워싱턴 사이의 싸움은 아주 치열하게 펼쳐졌다. 우군인 미국이었지만, 휴전을 두고 대통령이 워싱턴과 벌이는 신경전이 매우 치열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의 최종 상대는 몇 개월 전 한국을 다녀갔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였다. 그러나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아이젠하워는 원격(遠隔)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투지를 시험해 보고 있었다. 그 대리인은 도쿄에 있던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이었다.

 사실이지, 나는 그 싸움의 속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내가 대통령이 클라크 장군과 협상을 벌이면서 기(氣)싸움을 벌이는 장소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이 대통령이나 클라크 장군으로부터 협상에 관한 내용을 전해 들으면서 차츰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었던 당시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상대로 아주 험난한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때로는 서로 얼굴을 붉히며 다시는 보지 않을 것 같은 험악한 상황까지 치달을 정도로 그 싸움은 심각했다.

 당시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는 4월 들어서 점차 뜨거워지고 있는 한국인의 휴전 반대 시위를 일종의 ‘사고’로 보고 있었다. 휴전협정을 꼭 성사시키려는 워싱턴의 의지는 견고하기 짝이 없었고, 이에 반대하는 한국인들의 시위 또한 들불처럼 번지고 있 었 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한국인의 시위를 방관(傍觀)했다. 내가 모르는 사안이기는 하지만, 방관에 앞서 방조(傍助)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했다. 대통령 스스로 거침없이 ‘북진통일’을 외치는 마당에 국민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번지는 휴전 반대 데모는 반가운 것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클라크 장군은 그의 회고록인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라는 책자에서 그 당시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음을 적고 있다. 그는 한국인의 휴전 반대 데모가 거세게 불붙을 무렵인 1953년 4월 3일, 변영태 당시 한국 외무부 장관이 미국 대사 에리스 브릭스와 만났다고 했다. 변영태 장관은 미국 대사 브릭스에게 한국 정부가 곧 휴전에 관한 조건을 제시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했다는 것이다. 워싱턴의 변함없는 휴전협정 타결 의지, 서울과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불붙고 있는 한국인의 휴전 반대 시위가 서로 평행선을 그으면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라서 미국 관계자들은 곧 전해질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意中)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공식적인 행보(行步)가 있었다. 그해 4월 24일 워싱턴에 주재 중인 한국 대사관의 양유찬 대사가 백악관으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찾아갔다. 양 대사는 그 자리에서 휴전협상에 관한 대한민국의 메시지를 전했다.

 아마도 거대한 폭탄이었다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던 유엔군 총사령부, 주한 미국대사관, 8군 사령부 등은 워싱턴으로 전해진 그 대한민국 경무대의 뜻을 받아들고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당시 위상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주장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아니 북악산의 깊은 품속에 안겨 있는 경무대로부터 나온 메시지는 아주 도전적이었다. 싸움꾼 이승만 대통령의 강한 결기가 엿보이는 메시지였다. 휘발성이 높아 성냥불을 그어 갖다 대면 그대로 터져버릴 수 있는 거대한 폭발물 같은 내용이기도 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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