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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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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철호
논설위원

“연평도 포격으로 북한 김정은이 큰돈을 챙겼다는 소문이 있다.” 워낙 고위 핵심당국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라 무시하기 힘들다. 지난달 23일 연평도 포격으로 역외 선물환(NDF) 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이 1176원까지 튀어오르자 북한이 떼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9·11 테러’ 때 풋옵션을 사들여 거액을 손에 넣었다는 오사마 빈 라덴의 음모론이 연상된다. 일단 외환은행 딜러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가능한 이야기인가.

 “그날 서울 외환시장은 평온하게 끝났다. 오후 3시부터 20분간 NDF시장도 눈치보기 장세였다. ‘민가(民家) 피폭’이란 속보가 뜨자 난리가 났다. 북한이 내부자 거래를 했다면 이 20분간, 첫 포격 이후 46분간의 공백을 설명하기 힘들다.”

 -포격 직전 7거래일간 20원 이상 올랐는데.

 “11일의 도이치증권 옵션 충격이 컸다. 18일엔 규제리스크(외국인 채권 과세)도 부각됐다. 이런 흐름까지 읽었다면 프로 중의 프로다.”

 -환율로 장난치기 어렵다는 뜻인가.

 “NDF에선 홍콩·싱가포르의 미국계 은행에 계좌를 트고 달러로 거래해야 한다. 국제 제재로 북한은 달러 결제가 어렵지 않은가.”

 수출입은행의 국제금융 담당자는 생각이 좀 다르다. 중립적 입장이다. 북한이 돈 세탁을 통해 위장할 수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 팀장은 “홍콩·싱가포르는 헤지펀드 설립이 자유롭다”고 했다. 북한 달러가 중국 옌볜(延邊)으로 흘러나가 헤지펀드로 둔갑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것이다.

 외환딜러 출신의 탈북자 최세웅씨의 얼마 전 월간지 인터뷰도 관심이다. “수십만 달러의 현찰 뭉치를 갖고 북·중 국경을 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북에서 국제금융의 모든 것을 배웠다. 나만 해도 오스트리아 빈에서 2년간 연수했고, 대부분의 북한 국제금융 담당자들도 마찬가지다.” 최씨는 “북한이 국제금융에 무지한 게 아니라 남한이 북한의 국제금융 실력에 너무 무지하다”고 했다.

 북한의 시장 조작 여부는 계좌를 일일이 열어보기 전에는 진상을 알 수 없다. 빈 라덴의 음모론도 소문으로 끝났다. 중요한 것은 한국 경제가 그만큼 열려 있다는 점이다. NDF시장의 하루 평균 거래액은 100억 달러가 넘고, 서울의 주가선물과 옵션시장은 세계적 규모다. 정확한 사전 정보만 있으면 수백만 달러의 증거금으로 1억 달러 이상의 차익을 쉽게 남길 수 있다. 이는 북한이 한 해 개성공단에서 벌어들이는 돈(5000만 달러)의 두 배다.

 연평도 포격으로 북한의 금융시장 영향력은 확인됐다. 시장을 2~3%만 움직일 힘이 있다면 누구든 투기 유혹을 받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더구나 마약을 밀매하고 위폐(僞幣)를 제조한 혐의까지 받는 나라가 북한이다. 정상 국가가 아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열린 사회다. 사방으로 북한의 도발에 취약하다. 전방만 주시할 게 아니라 후방도 살펴봐야 한다. 국민의 80%가 강력한 대응을 원하면서 압도적 다수가 전면전을 반대한다. 이중적 심리다. 언제 ‘위기감’이 ‘불안 피로감’으로 돌변할지 모른다.

 영국의 경험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히틀러는 물리쳤지만 살기에 불편해졌다. 독일에서 뺏을 식민지나 배상금은 없었다. 미국에 진 빚만 300억 파운드에 이르렀다. 거리엔 승전 구호가 넘쳤지만 영국 국민의 60%가 이민을 희망했다. 당시 칼 포퍼가 쓴 책이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다. 그는 좌·우 양극단을 경계했다. “진리는 ‘과연 이 이론이 진리가 아닐 가능성까지 열어놓았는가’에 의해 구분된다”는 지적은 음미해볼 대목이다.

 북한이 NDF 시장에서 장난쳤다는 소문은 대북정책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한다. 과연 우리는 합리적 대북 노선을 짜는지 궁금하다. 포퍼는 ‘비판적 합리주의’를 강조했다. 항상 토론을 주문했다. 군사적 대응만이 능사가 아닌 듯싶다. 강경책 일변도는 불편하다. 튼튼한 안보와 유연한 외교, 투 트랙(two-track)으로 회군(回軍)할 때가 다가오는 느낌이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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