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오지마을의 노래 전령사, 집배원 민병철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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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마저 손길이 닿지 않는 강원도 산간 오지마을. 이곳에 8년 동안 우편물을 배달해온 집배원 민병철(48)씨. 그는 노인들이 대부분인 주민들에게 외부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사이자 잔심부름까지 해주는 가족같은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노래를 함께 전해주는 특별한 집배원이다. 그는 단독 노래집을 낸 가수다.

“작년에는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다리 인대가 늘어나는 바람에 집배원 생활 8년만에 처음으로 한 달을 꼬박 쉬었습니다. 다시 출근하는 날, 아내가 ‘몸 조심하라’고 한 마디 합디다. 아내는 8년 내내 아침마다 같은 소리를 하네요”

기자가 만난 날에도 그의 얼굴은 멍이 들어 있었다. "산길 오가는 삶, 거울이나 보나요? 오토바이를 운전하다 나뭇가지에 부딪쳐 생긴 상처입니다"

그가 맡은 지역중에 강원도 정선군 남면읍 광덕 1-2리는 가장 오지다. 총 27가구를 들르는데, 오토바이로 달려도 꼬박 6시간 이상이 걸린다. 구비구비 고개를 넘다보면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가는데 40분이 걸리기도 한다. 남면읍의 우체국을 출발하기 전 민씨는 세 겹의 옷을 껴입고도 신문지를 배와 무릎에 덧댄다. 매서운 강원도의 겨울 칼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다.

기자는 서울에서 차를 타고 정선군까지 3시간 30분. 다시 15분정도를 달려 남면읍에 도착했다. 광덕리 버스정류장까지 1시간 가까이를 더 들어가야 했다. 하루에 두 번 운행하는 버스편이 광덕리와 남면읍을 이어주는 교통편의 전부다. 더구나 버스정류장에서 광덕1-2리까지는 교통편이 없다. 주민들은 읍내를 가려면 걸어서 가파른 고개 몇개를 넘어야 한다. 아니면 마을 주민중에 차가 있는 사람읍내에 나갈때 기대야 한다. 그러다보니 주민들의 내왕은 거의 없다. 민씨가 우편물을 배달해야 하는 곳이다.

“읍내 나가 보건소에서 약을 타야 하는데 이놈의 무릎이 말을 안 들어”

집 앞에 홀로 앉아 있던 최내월 할머니(83, 광덕 1리)가 민씨를 붙잡고 하소연을 한다. 같은 마을의 심만춘 할머니(86세, 광덕1리)는 "수돗물에서 구정물이 나온다"며 도움을 청한다.

“어제 얼라(아이)들이 개구리 잡는다고 난리를 펴서 그런가? 계속 틀어놓고 있어봐요. 조금 있으면 맑은 물이 나올 거에요” 곰살궂은 민씨의 대답이다.

주민들에게 민씨는 우편물을 배달하는 집배원 이상이다. 우체국에다 대신 저축을 해주고 막힌 하수구를 뚫어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담배나 과자 등 소소한 심부름도 도맡아한다.

3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사는 심씨 할머니는에게 민씨는 더욱 반가운 손님이다. 이날도 할머니는 "밥 먹고 가"라며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는 것을 민씨가 억지로 말렸다.

“김씨 할머니 댁에는 전해드릴 우편물이 없어도 꼭 들립니다. 끼니를 거르시거나 고구마, 감자 한 두 개로 때우는 분들이 많아요.” 민씨가 일부러 마을 어르신들에게 점심을 얻어먹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들보다 더 자주 보니, 안 보면 허전하지"
김옥분 할머니(77세, 광덕 1리)는 사탕을 꺼내 놓고 민씨에게 노래 한 자락을 청한다.

"세월이 주름인가요∼ 시간이 흘러갔나요∼" 민씨의 노래에 김씨 할머니의 어깨가 덩실거린다. 구성지게 부르는 민병철씨의 노래실력이 심상치 않다. 그는 2005년 정규앨범 '억새풀 사랑'을 낸 어엿한 가수다. 그는 아는 노래만 무려 7000여 곡에 달한다고 말한다. 덕분에 민씨는 주민들에게 '노래하는 집배원', '걸어다니는 노래방'으로 불린다.

민씨의 고향도 이곳 남면읍이다. 20대 초반 서울생활에 대한 동경과 가수가 되고 싶은 꿈 때문에 무작정 서울로 나갔다. 카바레 등에서 밤무대 가수활동도 하다가 8년 전 집배원으로 취직하면서 고향으로 발령이 났다. 본인도 그것을 원했다.

"고향마을로 와서도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정선군 행사에서 사회도 보고, 노래도 하니까 아는 사람이 작곡가를 소개시켜줬어요. 그래서 만든 게 첫 앨범인 '억새풀 사랑'이죠. CD로 3000장을 만들었는데, 2000장은 선물로 주고 대부분은 지금도 갖고 있어요. 오지마을 어르신들에게도 CD를 드렸는데, CD 플레이어가 없어 즐겨듣는 분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민씨는 배달을 할 때, 하루종일 노래를 흥얼거린다. 밭일을 하다 집배원 오토바이가 지나가면, 어르신들은 곧잘 민씨를 불러 세워 노래를 청한다. 조명도, 음향도 없지만, 새참과 민씨의 노래가 어울어지면 가수 '남진', '나훈아'의 호텔디너쇼 부럽지 않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민씨에게 노래를 들어주는 어르신들이 오히려 고맙다.

민씨는 지난 6월부터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시골마을에서 무료공연을 한다. 공연에 참가한 가수와 마술사들은 한국이벤트협회 정선지부장으로 있는 민씨가 발품을 팔아 어렵사리 섭외한다.

공연을 하는 날, 시골마을에는 조그만 잔치가 벌어진다. 텃밭에서 고추를 따고, 국수를 말고 부침개를 부친다. 1시간 30분 남짓 공연하지만 어르신들은 언제나 아쉽단다. 3시간이 넘게 붙잡혀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

"고향인 남면에 와서 가수의 꿈을 이룬 셈입니다. 집배원 일을 그만두는 순간까지 오지마을 어르신들을 찾아 노래를 불러드리고 싶습니다"

폭설로 길이 막혀 찾아갈 수 없는 날, 민씨는 전화로 못가게 됐다고 전한다. 그를 기다리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에는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이 있다.

"지난 해 겨울 같이 '6시 내 고향' 방송에 출연했던 유필규(81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제 노래를 무척 좋아하셨던 분이셨는데..."

돌아가신 어르신을 생각하면 눈시울을 붉히는 그. 민씨는 돌아가신 어르신에게 전해드리지 못하는 우편물을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중앙일보 디지털뉴스룸=김정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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