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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4-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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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나는 연극학과가 있는 미국 동부의 어떤 대학에 방문학자와 비슷한 신분인 체류작가로 한국을 떠났다. 그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와 우리 대학에서 연극을 가르치고 있는 선배 하나가 나를 한국의 중견 연출가 자격으로 추천해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떠날 때의 내 속마음은 1년의 체류기간 동안에 준비를 갖춘 뒤에 모든 것 다 잊고 그곳 대학원에서 몇 년이고 연극 공부를 더 해보는 것이었다.

 처음 몇 달은 먹은 마음대로 되어 나가는 것 같았다. 어학 코스에도 들어가고 오래 손 놓고 있었던 그 방면의 책도 구해 읽었다. 하지만 여섯 달도 안 돼 나는 그 유학 계획이 터무니없이 무모한 것이었음을 깨달아야 했다. 먼저 출발 초기의 내 장한 기세를 꺾어놓은 것은 영어였다. 나는 영어 실력이라면 당연히 독해력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세대의 끄트머리였고, 그나마 대학 입시를 끝으로 영어는 내 전공과 상관없는 분야가 되어 등한히 여겨 온 터였다. 특히 그 듣기와 말하기는 이십 년 만에 갑자기 머리 싸매고 덤벼든다고 해서 가까운 날에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기는 어려울 듯했다.

 어느새 마흔을 뛰어넘은 나이도 여러 갈래로 내 유학에 비관적인 전망을 보탰다. 그 나이가 되도록 나라 밖으로 나돈 일이 드물어 그사이 굳어진 여러 습속들은 날이 갈수록 해외 체류를 견디기 어렵게 했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섯 달이 지나면서는 먹는 것부터 자고 입고 움직이는 것까지 모든 것이 불편하고 못마땅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한인 거리를 어정거리며 지내도 지난 사십 년간 익숙했던 세계와 문화는 뻣뻣한 정체성으로 고개를 쳐들고 새로움에 적응하거나 귀속하기를 거부했다. 그 방면으로는 충분히 단련된 것으로 알았는데, 느닷없이 외로움을 타기 시작한 것도 그 놈의 나이 탓이 아닌지 모르겠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나름대로 터놓고 간 알음들도 몇 달 안 돼 끊어지고 오래잖아 나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한 해나 다름없는 고립과 격리에 빠졌다.

 그리하여 미국에 간 지 열 달이 지나 대학에 지원서를 넣어야 할 때가 왔을 때, 나는 그런 1년을 더 보내 준비를 갖추거나 유학을 접거나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그때 내게 세 번째 선택으로 다가온 것이 거리의 학교들, 특히 브로드웨이의 극장가였다.

 내가 브로드웨이에 늘어선 극장들을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은 뭔가 유학 계획이 삐걱거린다는 조짐이 느껴지기 시작한 무렵의 어느 날부터였다. 브루클린의 싸구려 원룸에 거처를 정하고 석 달 만인가, 나는 별 기대 없이 한국에서 불충분한 번역극 형태로 보았거나 비디오로만 본 연극들을 보러 브로드웨이로 갔다. <미스 사이공>으로 기억하는데, 비디오로 볼 때와는 거의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주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등한 ‘선수끼리’의 제한적인 감동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한 연출가로서의 전문성에 바탕한 안목으로 살피고 있었지, 연극 공부로서의 관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나는 이따금씩 브로드웨이로 나가 그 방면의 이름 있는 작품들을 보았는데, 그런 관람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연극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지원서를 낸 대학으로부터 보기 좋게 퇴짜를 맞은 날 나는 무심히 찾아갔던 한 극장에서 새삼 뮤지컬이란 양식에 눈뜨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그전에 내가 관람했던 작품들도 ‘아가씨와 건달들’이나 ‘크레이지 포 유’ 같은 전형적인 아메리카 풍에서 ‘캐츠’ ‘레 미제라블’ 같은 팝 오페라 풍까지 편차는 다양했지만, 대개는 뮤지컬이었다. 하지만 나름의 전문성에 확보한 거리감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동안 한 번도 내가 뮤지컬만 보아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데, 그날 처음으로 한 순수한 관객이 되어 뮤지컬을 감상하게 되었다. ‘거미여인의 키스’라는 작품이었다.

 그때 브로드웨이에서의 내 연극 관람은 많은 발품이 들고 준비가 요구되거나, 최소한 배우의 대사를 대강이라도 귀띔해 줄 수 있는 동행을 필요로 했다. 발품이나 준비는 관람 전에 주요 대사와 노래 가사들이 들어 있는 프로그램을 얻거나 영어 각본을 구해 대강의 줄거리를 파악해두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날은 일종의 방심 상태에서 불쑥 극장을 찾은 것이라 제목 외에 그 연극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곁에서 대사나 노래를 듣고 귀띔해 줄 사람도 데려가지 못해 처음부터 귀머거리 관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정황을 알 수 없음이 독특한 음악성과 배우들의 격렬한 연기 속에서 야릇한 강조의 효과를 냈다.

 나는 잘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진지하고 심각한 진실이 저 무대 위에서 실연되고 있다. 진실 그 자체가 나를 설득하거나 이해시키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오히려 그래서 저 진지함과 심각성은 더욱 큰 카타르시스 효과를 낼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대강 그 정도로 정리될 수 있겠지만 그때는 거의 원인을 알 수 없는 감동으로 굳어 나는 그 세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극장을 나오는 대로 그 대본을 구해 이틀이나 씨름하듯 읽었는데, 다 읽고 나자 기이하게도 전날의 감동이 완성되는 기분이었다. 그게 내가 뮤지컬과 의식적으로 친화를 이루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뒤 내 본격적인 브로드웨이 순례가 이루어졌다. 나는 거리의 학교들이란 개념을 급조해내고 대학에 가서 이론적으로 공부하는 대신 거리의 극장가에서 새로운 연극을 배우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먼저 브로드웨이뿐만 아니라, 오프 브로드웨이,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까지 현재 공연되고 있는 것은 모두 보아두는 것으로 내 수업 내용을 삼기로 했다. 그런 다음 기회가 있으면 그들 틈에 끼어 함께 작품을 만들어 보는 것으로 내 유학을 마무리 짓겠다는 간 큰 포부도 품어보았다.

 내가 혜련을 다시 만난 것은 그렇게 뉴욕의 극장가 순례가 시작된 지 보름쯤 되어 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작정하고 전부터 이름만 들었던 ‘블루맨스 클럽’이라는 실험극 하나를 보기 위해 오프 브로드웨이 지하에 있는 그들의 극장으로 갔다. 대사를 없애고 음악성을 타악기 중심의 팝으로 단순화하는 대신 아크로바트가 강화된 것이란 소문을 듣고 갔는데, 낯설고 그래서 새롭기는 해도 고전적인 뮤지컬이 주는 감동에는 미치지 못했다.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의외의 돌출이 주는 충격에서 깨어나면서 오히려 씁쓸해지는 기분으로 극장을 나오는데 누가 등허리 쪽을 쳤다. 돌아보니 혜련이었다. 나를 보고 달려왔는지 돌아선 내게 금세 안겨올 듯 앞으로 쏠린 자세였다.

 “이게 누구야? 여기서 만나네.”

 내가 받아 안을 태세로 손을 내밀며 그렇게 물었다. 내게로 쓰러져오는 것을 면한 혜련이 약간 가쁜 숨을 고르면서 받았다.

 “선생님이야말로 여기 웬일이세요? 언제 건너 오셨어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어제 그제 헤어진 사람 같은 억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헤아려 보니 삼 년이 넘었고, 그동안에도 여러 차례 궁금하게 여기며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기도 했다. 아내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 1년을 빼면, 가끔씩은 그녀를 떠올리고, 알 만한 사람에게는 그녀의 근황을 수소문해 본 적도 있었다. 미국으로 올 때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녀였으나, 마지막으로 받은 편지가 리투아니아에서 온 것이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못했을 뿐이었다.

 “벌써 삼 년이다. 꿈에 길 간 것 같은 그 그림엽서 말고는 그렇게도 연락할 길이 없었니?”

 나는 먼저 그렇게 그녀를 나무라놓고, 다시 물음에 답했다.

 “금년 연초에 왔다. 공부하러. 나는 여기 와서 공부 더하면 안 되는 거냐?”

 “그게 아니라 - 아니, 결국 그 언니하고는 온전히 끝나고 말았군요. 그런데 그게 난데없는 공부로 달랠 만한 상처였어요? 그때 선생님, 정말로 그 언니한테 열중하신 것 같았는데······.”

 그 대답으로 미루어 혜련은 그동안 내게 일어난 변화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얘기를 하는 표정이 전에 없이 무겁고 어두워 내게는 낯설었다.

 “너도 들어 알고 있구나. 그런데 일껏 다져온 유학 결의를 이혼 후유증 치료용으로 폄하하지 마라. 나는 너처럼 도망치려고 이리로 온 게 아니다.”

 내가 짐짓 굳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문득 쓸쓸하게 웃으며 받았다.

 “저도 도망치려고 미국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에요.”

 “그럼 왜 그렇게 사라졌어?”

 “내가 무언가 잘못 찾아간 느낌이 들어서요. 그렇게 그리워하며 돌아가 놓고 말예요.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은 오히려 여기서 찾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그리고 리투아니아는 또 뭐야? 거기는 왜 갔고 언제 이리로 돌아왔어?”

 “아, 그때 그거요? 그냥 여행이었어요. 뭐라고 해야 하나, 격세유전 인자의 충동에 따라 어머니의 모국을 한번 돌아본 것이라 해두죠.”

 “격세유전 인자에 어머니의 모국이라. 복잡하군. 그래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은 어떻게 찾기나 한 거야?”

  내가 그렇게 묻고 있는데, 전형적인 앵글로색슨 풍의 청년 하나가 기타 가방을 등에 메고 가만히 다가와 우리를 바라보며 끼어들 틈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런 백인 청년을 알아 보았을 때는 혜련도 그를 본 듯했다. 왠지 습관적이라고 느껴지는 미소로 그를 바라보며 영어로 짧게 말했다.

 “왔어? 아 그래, 여기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그러고는 나를 돌아보며 별 표정 없이 그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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