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빌려드립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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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호 10면

안녕하세요? 이름도 모르는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냥 당신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만난 날은 크리스마스 전날이었어요. 그날도 저는 변함없이 회사에 출근했어요. 평범한 날이었죠. 사무실이 있는 강남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답니다. 트리 모양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캐럴송이 눈처럼 내렸어요. 화려하고 흥겨운 분위기였죠. 세상이 온통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무대 같은 그런 날. 당직을 마치고 저는 붐비는 거리를 걸어 퇴근했습니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좌석 버스를 기다리면서 잠깐 하늘을 봤어요.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흐린 하늘. 저는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았지요. 평소처럼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습니다. 『칼의 노래』. 왜군의 칼이 이순신 장군의 아들 오른쪽 어깨를 가르는 대목을 읽고 있는데 그때 제 오른쪽 어깨를 뭔가가 눌렸어요. 바로 당신이었죠. 몸집이 좋은 중년의 남자. 중년이래야 사실 제 또래거나 어쩌면 저보다 어릴지도 모르죠. 당신은 전형적인 회사원 차림이었어요. 감색 양복에 회색 와이셔츠와 자주색 체크무늬 넥타이. 당신은 가방 위에 올려놓은 핑크색 케이크 상자를 손으로 꼭 쥐고 있었어요. 손등에는 털이 검실검실 났고, 손가락이 짧고 통통했어요.

아마 고단했겠지요. 그러니 그렇게 무심히 자신의 몸을 제게 맡기고 기댔겠지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저를 믿고 말입니다. 퇴근 후 동료와 어울려 가볍게 한잔 마신 걸까요? 당신이 숨 쉴 때마다 달큰한 술 냄새가 제게로 전해졌어요. 조금 전까지 당신의 일부였을 어떤 것이 제게로 와 저의 일부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어요. 젊은 날 당신의 꿈은 무엇이었을지. 지금은 어떤 일을 하는지. 당신의 가족과 친구는 어떤 사람인지. 순하게 잠든 당신 옆얼굴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알 것 같았어요. 당신의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어제처럼 출근하고 일을 했을 테죠. 이틀 전에 먹었던 식당에서 같은 메뉴로 점심을 때우고 일생보다 지루한 오후를 버텼겠죠. 겉으로는 활기차고 분주했지만 불안과 무기력과 우울이 당신을 짓눌렀을지도 모르죠. 퇴근하기가 무섭게 찾은 식당에서 반주로 독한 술을 삼켰을까요. 어쩌면 기름 많은 두툼한 삼겹살이라도 솥뚜껑에 얹어 지글지글 구워 먹었을까요. 상추에 싸 볼이 터져라 우걱우걱 씹었을지도 모르죠. 꾹꾹 삼키다 목이 메어 물 대신 소주를 들이켰겠지요. 어떻게 아느냐고요? 당신의 오늘이 저의 어제고 당신의 어제가 저의 내일이니까요.

저는 어깨를 기꺼이 내어주었어요. 마치 그것이 제가 당신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혹시 제 좁은 어깨를 불편해 하지는 않을까 마음을 쓰면서요. 다행히 당신도 제 어깨가 편한지 고개를 뒤척이지 않고 곤하게 잤지요. 순하고 착한 잠. 그런데 가만히 보니 당신과 제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이 조금 어긋났어요. 저는 제 숨쉬기를 당신 호흡 리듬에 맞춥니다. 그제야 우리 두 사람의 몸은 같이 부풀어 올랐다가 함께 꺼졌다가 합니다. 차창 밖에는 눈발이 날리고 산타 복장의 젊은이 몇이 촛불을 들고 성가를 부르고 있었어요. 저도 당신이 편했나 봐요.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슬슬 졸음이 몰려와 잠들었으니까요.

저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러니 당신도 잘 지내시리라 믿습니다.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아내를 탐하다』와『대한민국 유부남헌장』『남편생태보고서』를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일하고 있다. 웃음과 눈물이 꼬물꼬물 묻어 있는 글을 쓰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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