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배터리 가는 데 3주, 가방 수선은 길면 6개월 … AS는 명품값 못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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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명품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백화점 명품 매출은 최근 5년 사이 세 배로 커졌다. 전체 시장 규모는 연간 5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애프터서비스(AS)나 고객 서비스는 시장과 걸맞게 성숙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부 브랜드의 고압적 고객 서비스, 지나치게 긴 수선 기간, 비싼 수선 비용 등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지난해 소비자원에 접수된 명품 관련 민원은 500여 건(국내 매출 10대 명품 집계). 명품 관련 소비자 신고는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백모씨는 최근 명품 시계 두 개를 중고시장에 팔았다. “명품 시계 보기가 싫어졌다”고 했다. 그는 올봄 까르띠에 시계를 수선하며 마음고생을 했다. 백화점에서 400여만원을 주고 산 시계는 4년 정도 썼더니 우레탄 소재의 손목 밴드가 갈라졌다. 수선에 걸린 시간만 한 달. 우레탄 밴드 15㎝를 가는 데 수선비 18만원을 냈다. 백씨를 더 화나게 한 건 매장 측 태도다. 물건을 받기로 한 매장에선 “접수가 안 돼 있으니 신분을 확인해야겠다”며 백씨의 신분증을 복사했다. 그러고선 “휴일이어서 확인이 안 되니 다음에 오시라”고 했다. 백씨는 “수선비도 너무 비싸고, 고객을 대하는 태도도 고압적이었다”며 “우리나라에선 명품업체 콧대가 너무 세다”고 말했다.

 명품 시장 연간 5조원 시대(업계 추산)의 또 다른 단면이다. 명품 매출이 급증하는 데 비해 AS나 고객 서비스 수준은 그만큼 성숙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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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원 품질 심의 결과도 인정 안 해

한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에서 핸드백을 구입한 김모씨는 손잡이 모양이 틀어져 수선을 의뢰했다가 기분이 상했다. 이탈리아 본사로 보내 수선을 해야 하는데, 수선 기간은 6개월이 걸리고 통관비와 수선비를 합쳐 40만원을 부담해야 한다는 설명 때문이었다. 김씨는 “큰 맘 먹고 산 가방을 아무 데나 맡길 수 없어 결국 본사로 보내긴 했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 6개월이나 걸린다는 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시계 배터리 교체에만 3주일, 가방 수선은 최장 6개월. 명품업체들은 “본사 지정 업체에서만 수리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하지만, 소비자들은 “자기 편의대로 스케줄을 정해서”라고 반발한다.

 기자는 서울시내 한 백화점의 까르띠에 매장에 시계 배터리를 교체하고 싶다고 직접 문의해봤다. 매장 측은 “3주일이 걸린다”고 답했다. 시내 매장에서 청담동의 수선 센터까지 시계를 보내는 데 일주일, 수선 차례를 기다려 배터리를 갈아끼우는 데 일주일, 다시 강남에서 시내 매장으로 돌아오는 데 일주일이 걸린다는 설명이었다. 일반 시계 수선 매장에 배터리 교체를 맡기면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까르띠에 관계자는 “국내에 시계 수선을 담당하는 기술자를 따로 둘 정도로 노력하고 있다”며 “수선을 의뢰하는 순서대로 수리하다 보니 다소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고 해명했다.

 일부 명품업체는 공식기관의 품질 심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모(47)씨는 올 5월 루이뷔통코리아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비를 맞은 가방에 얼룩이 생긴 데 대해 손해배상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오씨의 의뢰로 제품을 검사한 한국소비자원은 ‘가죽 불량’이라고 심의했지만, 루이뷔통 측은 “비 오는 날 가죽 제품을 가지고 나간 소비자 과실”이라며 환불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남부지법의 조정을 거치고 난 뒤에야 오씨는 가방값 200여만원을 환불받을 수 있었다. 루이뷔통코리아는 지난해 8월에도 비뚤어진 로고에 대해 ‘상품 하자’라는 소비자원 심의를 받은 바 있지만 “글로벌 기업이어서 한국 규정을 따르지 않는다”며 고객의 환불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 백화점 측은 전했다.

 소비자시민모임 윤명 조사연구부장은 “해외에서 산 제품은 아예 AS를 안 해준다는 불만이 많다”며 “소비자가 수백만원을 주고 명품을 구매했을 때는 제품 품질뿐 아니라 서비스에 대한 기대도 있기 마련인데, 국내 명품 브랜드는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장 운영 방침엔 백화점이 간섭 어려워”

일부 소비자는 명품 매장의 고객 응대 태도에 불만을 제기하기도 한다. 최근 프라다 매장에서 100만원대 가방을 구입한 박모씨는 백화점 측에 “매장 서비스가 시장보다 못하다”고 불만을 제기했다. 상품에 흠을 발견하고 교환을 요구하자 매장 직원이 “우리 매장엔 다른 상품이 없으니 다른 매장을 찾아가 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집 근처 매장에 상품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자 “거기도 상품이 없다”는 무성의한 답이 돌아왔다. 박씨는 “답답한 마음에 집 근처 매장을 찾아갔더니 같은 제품이 네댓 개 진열돼 있더라”며 백화점 측에 항의해 왔다.

 손님이 많으면 매장 앞에 줄을 세워 차례로 입장시키는 관행이나 일부 명품 매장이 CCTV로 고객을 지켜보는 것에 대한 불만도 일각에선 제기된다. 매장 평균 10여 개 정도 설치된 CCTV는 도난 방지의 목적도 있지만, 고객이 불만을 제기할 때 활용되기도 한다. CCTV 화면을 “상품을 구입할 때 이미 직원과 함께 확인하지 않았느냐”며 증거 자료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한 백화점 명품 담당 바이어는 “명품 매장의 서비스에 대해 기분 나쁘다는 반응을 보이는 고객이 많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각 브랜드의 매장 운영 방침에 대해선 백화점도 일일이 간섭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런 서비스가 차별화를 위한 전략이라는 시각도 있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과 김난도 교수는 “명품을 사는 이들은 사실 남보다 돋보이고 싶다는 차별화 욕구에 기인한 것”이라며 “매장에서도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하는 것이 아니라 구매력이 있는 고객에게 더 친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차별화 서비스를 채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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