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주인과 책의 노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97호 10면

“내가 읽던 책을 그냥 닫으면 어떡해?”
아내는 책을 읽다가 잠시 다른 일을 할 때면 책갈피를 사용하지 않고 책을 엎어놓는 버릇이 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 마치 내 등이 꺾이기라도 한 것처럼 불편해서 아내 몰래 책을 바로 해놓는다.
“책이 상하잖아. 책갈피를 사용하라니까.”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책을 접든지 책등을 꺾든지 그거야 내 맘이지. 사람이 책을 읽지 책이 사람을 읽는 게 아니잖아. 당신은 꼭 책의 노예 같아.”
아내는 책의 주인이지만 나는 책의 노예다. 나는 작가 장정일처럼 손을 깨끗하게 씻고 책을 만진다. 마음 같아서는 보석상처럼 하얀 장갑을 끼고 보석을 다루듯 책을 읽고 싶지만.

“노예가 아니라 깨끗하게 보면 좋잖아.”
아내는 거실 책장을 가리킨다.
“그렇게 책을 아끼는 사람이 책장 정리는 왜 안 한대?” “안 하긴.” “이렇게 무질서하게 아무런 원칙도 규칙도 없이 책이 꽂혀 있는 책장이 어디 있어요. 책장은 그 사람의 머릿속이라던데 혹시 당신 머릿속도 이렇게 뒤죽박죽인 거야?”

어떤 말이 아픈 것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데다 게으르다. 그렇다고 변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책은 사랑하지만 책장 정리는 사랑하지 않는다. 게다가 책을 제대로 분류하기도 어렵다. 단지 정리를 위해 애매하거나 ‘통섭’적인 책을 어느 한쪽으로 분류하는 것은 아무래도 폭력적이다.
“규칙이 왜 없어? 자기가 못 찾으니까 그렇지.”

나는 『공산당 선언』과 나란히 꽂혀 있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가리킨다. 어떤 분류로도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두 책을 맺어준 것은 내가 결혼정보회사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중매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책은 읽다 보면 다른 책이 저절로 떠오른다. 나는 그렇게 전혀 분야도 다르고 주제도 다르지만 잘 어울릴 것 같은 책을 찾아 짝을 맺어주었다. 가령 『햄릿』과 『공산당 선언』은 둘 다 책의 서두에 유령이 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두 책은 유령에 대해 서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또 아베 야로의 만화 『심야식당』은 레이몬드 카버의 『대성당』을 만나면 『대성당』 안에 들어 있는 단편의 제목처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나는 다윈의 『종의 기원』 옆에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꽂아주고,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에는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렇게 맺어준 책의 목록과 그 이유를 정리해서 『책 결혼시키기』라는 책을 써볼까 하는 어마어마한 희망을 품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게으른 데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내가 그런 엄청난 작업을 하기엔 무리란 것을.
“그러니까 이 책장에 있는 책들이 모두 그렇게 정리되어 있단 말이야?” “물론 아니지.” “왜? 하는 김에 다 하지. 일관성 있게.”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알고 보니 책들이 대부분 독신주의자라서.”

사실 내가 책장 정리를 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아내는 이미 책장이 꽉 차 더 꽂을 자리도 없는데 자꾸 책을 산다고 늘 잔소리다.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사온 책을 아내 몰래 책장에 숨긴다. 책 숨기기에는 아무래도 내 머릿속처럼 뒤죽박죽인, 정리되어 있지 않은 책장이 훨씬 나은 법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