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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 교정하다 추락, 마음 교정하고 일본 무대 정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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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호 14면

김경태는 9월 열린 한·일전에서 이시카와 료에게 7타 차로 대승하고 여세를 몰아 상금왕에 올랐다.

드라이버 입스로 고생한 선수는 박세리, 미셸 위뿐만은 아니다. 공을 똑바로 치는 것으로 유명했던 김경태(24·신한금융)도 이 병을 앓았다. 일본 투어에서 뛰어 국내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공황상태였다”고 말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 수렁 속에서 빠져나와 일본 투어 상금왕으로 돌아온 김경태를 만났다.

일본 투어 3승, 상금왕 오른 김경태

문제는 열 발자국에서 시작됐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2관왕에 오르고 2007년 한국프로골프에서 ‘괴물’이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김경태는 거리에 대해 고민이 있었다. 10야드만 더 치면 PGA 투어에서도 성공할 걸로 생각했다. 구질이 가볍다는 얘기도 들은 터였다. 그러다 한 조에서 함께 경기한 최경주가 거리를 늘리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하자 마음을 굳혔다. 2007년 겨울 스윙을 교정했다. 비교적 평평했던 스윙 궤도를 약간 세웠고 미세한 역피벗 현상도 바로잡았다. 다운스윙 시 왼손 등을 목표 방향으로 끌고 가던 것을 코킹을 한꺼번에 풀면서 공과 클럽페이스가 붙어 있는 시간을 길게 늘렸다. 김경태의 거리는 제법 늘었다. 당시 최장타자 배상문은 “나와 거리 차이가 거의 없어졌다”고 말할 정도였다. 대신 샷의 안정감은 약간 떨어졌다. 골프는 미세한 변화가 커다란 차이를 만든다. 다운 스윙 시 왼쪽 무릎의 작은 움직임이 몇 차례의 체인 효과를 거쳐 엄청난 헤드스피드를 만드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는 2008년 초 시작된 아시안 투어 첫 경기에서 예선 탈락했다. 김경태는 “적응이 안 된 상태로 곧바로 대회에 참가하게 됐는데 잘 안 되더라”면서 “과거 스윙으로 돌아가려면 곧바로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른 선수들이 경기할 때 그는 훈련장에서 샷을 다듬었다. 훈련량도 엄청나게 많았다. “연습장에서 완전히 자신감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골프장에 가면 여지없이 8오버파 같은 형편없는 스코어가 나왔다”고 했다. 운도 좋지 않았다. 전년도 성적이 좋아 어니 엘스 같은 대선수와 함께 경기를 했는데 위압감을 느꼈다.

드라이버 입스도 왔다. 페어웨이에서 50~60m씩 벗어났다. “한번 터지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더라. 아무렇지 않다가도 티잉 그라운드에만 올라가면 정신이 멍해졌다. 내가 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거의 공황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다른 선수들이 쑤군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너 왜 그러느냐, 왜 그렇게 못 하느냐”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골프 코스에서 뱀처럼 침착하고, 괴물이라는 별명을 들었던 그지만 “따뜻한 말을 듣고 싶었다”고 했다. 사람 만나는 게 싫어 연습장에 가기도 두렵고 선수들을 만나면 주눅만 들었다고 한다. 2008년은 악몽이었다.

긴장하는 것이 문제라면 심리 치료를 받으면 되지만 이것저것 얽히고설켜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변해버렸다. 항상 무서워서 짧은 채를 잡고 도망다니는 데 급급했다. 골프장에 가는 게 싫었다. 다른 선수라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경태는 어려움을 겪어 본 선수다. 그의 아버지 김기창(57)씨의 회고다.

김경태

“경태가 중학교 2학년 때다. 대회 1라운드에서 신발 앞창이 찢어졌다. 접착제로 붙였는데 다음 날 또 찢어졌다. 발이 신발 밖으로 나오자 경태는 뒤꿈치로 바닥을 찍으면서 걸었다. 경기가 끝난 후 신발을 사러 나이키 매장에 갔다. 쓱 둘러 보더니 ‘마음에 드는 게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아디다스 매장에 갔다. 거기서도 똑같았다. ‘너 왜 그러냐’고 물었다. ‘너무 비싸다. 한 번 우승했으니 용품업체에서 스폰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때까지 참겠다’고 하더라. ‘내일 어떻게 칠 거냐. 일단 하나 사라’고 호통을 쳤다. 경태는 ‘꿰매면 되지 않느냐. 안 사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어린 녀석인데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꿰맸지만 다음 날 또 찢어졌다. ‘신발이 얼마 한다고 이 고생을 하느냐’고 소리소리 질렀지만 경태는 그래도 버텼다. 결국 며칠 후 용품업체로부터 지원을 받더라.”
의지도 매우 강하다. 김씨의 회고다.

“남들 미국으로, 호주로 전지훈련 가는데 경태는 썰렁한 속초 연습장에서 연습했다. 마음이 아파서 ‘촌놈이 더 잘한다. 최경주와 박세리를 봐라. 된장·고추장 먹으면서 큰 사람이 더 잘되지 않더냐. 미국 가서 햄버거 먹고 비싼 레슨 받는 아이들보다 네가 훨씬 더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냥 기죽지 말라고 한 말인데 경태는 그 말을 굳게 믿었다.”

이런 정신력으로 김경태의 성적은 조금씩 나아졌다. 그러나 진정한 김경태의 모습은 아니었다. “항상 도망다니면서 근근이 파 세이브를 해 버티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달라진 계기는 2009년 여름이다. 이듬해 투어 카드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상금을 확보한 이후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내년 출전권을 따 놨으니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오랫동안 부진했기 때문에 누구도 나에게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90타를 쳐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되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후회 없는 경기를 해보자. 내 스윙 다 해보자. 도망다니지 말아 보자.”

첫 대회에서 컷 탈락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니 기분은 좋았다고 한다. 다음 주엔 국내에서 열린 삼성 베네스트 오픈에서 2위를 했다. “아 이거구나. 이렇게 해야 김경태구나.” 그러면서 그는 “골프에서 스윙 기술의 비중은 30%도 안 된다. 리듬, 마음가짐, 코스 공략 등이 더 중요하고, 특히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일본 오픈을 포함, 일본 투어에서 3승을 하고 상금왕이 됐다. 갤러리의 엄청난 응원을 받는 일본의 수퍼스타 이시카와 료와 시즌 마지막까지 상금왕 대결을 벌였다. 이방인으로서 주눅 들만 했지만 김경태는 “이시카와의 팬들이 많을수록, 관심을 많이 받을수록 더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경태는 한·일전 싱글 스트로크매치에서는 이시카와 료를 7타 차로 눌렀다. 일반 스트로크 대회에서 7타 차는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상대를 마주 보고 경기하는 1-1 매치에선 커다란 차이다. 홀 매치로 치렀다면 7홀 차가 나고 12번 홀에서 경기가 끝나는 상황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김경태는 첫 경기에서 이시카와와 한 조에서 경기했다. 한·일전에서 참패한 이시카와가 같은 조에서 경기를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김경태는 이 대회에서 4위를 했고 이시카와는 12위에 그쳤다. 이시카와는 계속 김경태를 넘으려 했지만 김경태는 두려움이 없었다. 상대 전적 1승7패로 뒤진 이시카와는 이후 “김경태를 존경한다”고 했다. 일본에 여성 팬클럽도 생겼다. 김경태는 “이시카와에게 이긴 것이 멋져 보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경태는 슬럼프 속에서 큰 고생을 했지만 오히려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려움을 이겨내니까 확고한 나만의 생각이 생겼다. 연습 때 잘 안 되면 불안했는데 이제 그런 생각이 없어졌다. 잘 되든 안 되든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간다. 혹시 잘 안 되더라도 후회 없이 갈 수 있다는 신념이 생겼다”고 말했다. 한국 골프선수들이 일본 등 세계에서 이름을 떨치는 비결에 대해 김경태는 “우리 선수들의 훈련 여건은 뛰어나지 않은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신력이 강해 좋은 성적을 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경태는 세계랭킹 32위다. 2011년 4대 메이저 대회에 모두 나갈 수 있다. 지난해 디 오픈과 PGA 챔피언십에 나가 모두 48위를 했는데 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김경태는 특히 마스터스를 기대하고 있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은 퍼트 실력이 좋은 김경태에게 잘 맞는 코스다. 김경태의 메이저 우승이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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