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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단체의 존립은 대중 신뢰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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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김병철
한국필립모리스 전무

1992년 2월, 미국에서 구세군에 이어 둘째로 큰 기부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는 창립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당시 최고 경영자(CEO)인 윌리엄 아라모니의 거액 연봉과 호사스러운 씀씀이 등 기금 유용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미국인들의 분노는 거셌다. 100여 년의 역사, 2100여 개의 지부에서 운용하는 기금 규모만 30억 달러인 메머드급 기부단체로서 신뢰가 높았기에 실망의 골은 더욱 깊었다.

 결국 CEO가 퇴진하고 기금운용 시스템의 대대적인 개편이 뒤따랐지만 후유증은 컸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단체의 재기는 놀랍다. 올해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50대 브랜드 중 당당 26위다. 비영리단체로서는 유일하게 포함됐다. 바닥 끝까지 떨어졌던 신뢰를 회복한 비결은 무엇일까. 철저한 자기반성과 혁신을 지속했기에 유나이티드 웨이의 회생이 가능했다.

 올 연말 우리나라의 기부 문화는 큰 위기에 봉착했다. 대한적십자사의 아이티 지진 구호성금 정기예탁 논란과 뒤이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기금 유용 파문 때문이다. 세밑의 자선 냄비가 바닥이 보일 정도로 썰렁하고, 결국 불우이웃들만 애꿎은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유나이티드 웨이의 몰락과 재기과정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명확하다. 따뜻한 기부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신뢰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비결은 투명성의 강화라는 평범한 시장원리다. 먼저 자선단체는 철저한 혁신과 조직 개편을 통해 자칫 썩기 쉬운 권력을 감시할 내부 견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유나이티드 웨이 역시 공정한 이사진의 선출, 기금운용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시스템 도입 등 내부 견제 장치를 만들고 운용함으로써 미국인의 신뢰를 회복했다.

 더불어 자선단체들의 기부금 운용을 감시하고 공신력 있는 기부 데이터를 구축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풀어야 할 과제다. 현재 국내 자선단체의 투명성 확보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아직 미미하다. 2007년 비영리단체의 총체적인 정보공개를 목적으로 설립된 가이드스타 한국재단에 따르면 총 1045개 비영리기관이 등록돼 있지만 이 가운데 세입·세출 결산서와 같은 최소한의 회계내용을 공시한 기관은 95개에 불과하다.

 기부 선진국인 미국 정부는 기부단체에 조세지원 혜택을 주는 한편 이를 감시하고 평가하는 공공단체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국세청(IRS)이 주도해 비영리 자선단체의 면세 인증과 정기적인 검증 테스트를 진행한다. 비영리 자선단체의 표준화된 회계보고양식인 ‘Form 990’과 기부금의 규모·추세를 집계하는 ‘Giving USA Foundation’ 같은 단체는 공공성 확보의 근간 역할을 한다.

 공동모금회는 이번 사태에 대한 쇄신안을 통해 모금 및 배분의 공시시스템을 운영하고 항시 체제로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이 투명한 선진 기부문화로 도약하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김병철 한국필립모리스 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