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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플래쉬〉, 인간은 100% 동물?

중앙일보

입력

'100% Animal(100% 동물)'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라이브 플래쉬>에서 한순간 눈길을 잡아끄는 글귀다. 척추장애로 휠체어 농구선수가 된 다비드가 체육관에서 연습할 때 입고 있는 티셔츠에 쓰여있는 이 문구는 영화에 깔려있는 핵심 전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이 영화의 주인공 5명 사이에 오가는 욕망, 질투, 의심, 배신 등 진하고 복잡한 감정들은 결국 영화의 제목이 암시하듯 인간이 '살아서 펄펄 뛰는 육체'(Live Flesh)를 지닌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80년대 이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 루이스 브뉴엘 이후 침체됐던 스페인영화의 성가를 높였다는 평을 듣고 있는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탄생에서 시작해 탄생으로 끝나는 순환고리 속에 1970년과 1996년 사이에 변화된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을 깔아놓았지만 영화의 핵심은 결국 이성보다는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대한 관대한 이해처럼 읽힌다.

또 한 명의 주인공 엘레나는 죄의식 때문에 하반신불수인 다비드와 결혼하고, 마약에서도 손떼고 자선사업을 하면서 현모양처와 같은 삶을 살지만(감독은 한때 건장한 경관이었던 다비드가 엘레나에게 육체적 쾌락을 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온전한' 육체의 결합에 대한 욕망을 이겨내지 못한다. 엘레나가 자신에게 집요하게 다가오는 빅토르와 가지는 정사장면은 스페인어로 된 영화제목의 뜻인 '떨리는 살'이란 의미가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될 정도로 절실하고 절박하다.

주인공들을 단편적으로 언급해 전체의 그림이 잘 잡히지 않는 독자들을 위해 먼저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살펴보자. 이 영화는 5명의 남녀, 정확히 구분하자면 1명의 청년과 두 쌍의 부부의 이야기다. 20대의 청년 빅토르와 30대의 젊은 부부 다비드와 엘레나, 그리고 40대의 중년부부 산초와 클라라이다. 이 다섯 명은 빅토르를 고리로 삼아 운명적으로 연결된다. 이들 사이에서 마치 게임처럼 펼쳐지는 흥미롭고 긴장감 넘치는 관계는 빅토르가 엘레나를 찾아가면서 벌어진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다.

영화는 빅토르의 탄생으로 시작한다. 창녀인 빅토르의 엄마는 프랑코정권이 비상계엄령을 내려 거리에 누구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1970년 크리스마스 밤에 갑자기 진통을 느낀다. 삼엄한 거리에 나오지만 아무도 없고, 겨우 버스를 얻어타지만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버스에서 아이를 낳고 만다. 이렇게 태어난 빅토르와 어머니에게 주어진 것이라곤 평생 버스무료승차권이다.

세월은 흘러 빅토르는 잘생기고 순진한 사춘기 10대로 성장한다. 빅토르는 클럽에서 만나 즉석에서 관계를 가졌던 엘레나라는 여자에게 푹 빠지고 1주일 뒤 만나자는 약속을 믿고 그녀에게 전화를 한다. 하지만 이탈리아 외교관의 딸로 마약중독자인 엘레나는 빅토르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마약업자의 연락만을 애타게 기다릴 뿐이다. 사춘기적인 집착을 지닌 빅토르는 그녀의 아파트를 찾아가고 엘레나는 그런 그에게 총을 겨눈다. 고성과 총성이 난 이들의 대결은 이웃의 신고를 불러오고, 이 신고를 받은 두 명의 경관 다비드와 산초가 엘레나의 집으로 출동한다. (엘레나가 위협총격을 할 때 엘레나의 집 TV에서는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범죄 예행연습'이 방영되고 있다). 파트너인 다비드는 한창 무르익어가는 젊은 경관이지만 산초는 알코중독자이고 더군다나 의처증이 있어 아내를 폭행하는 등 감정상태가 엉망인 중년의 경관이다. 아내 클라라에 대한 그의 집착은 자주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두 경관이 엘레나의 집에 도착하고, 엘레나는 건장한 다비드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은 강렬한 이끌림을 느낀다. 그러나 술에 취한 산초와 빅토르가 총을 둘러싸고 몸싸움을 하다 총이 발사되고, 이 총격으로 다비드는 하반신불수가 된다. 그리고 빅토르는 6년간의 옥살이를 시작한다.

감옥에서 빅토르는 복수를 맹세한다. 그는 TV에서 장애자올림픽을 관람하다 다비드와 엘레나를 목격하고, 이들 부부의 행복을 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그는 마치 엘레나를 빼앗는 방법이 육체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듯 엘레나에게 다가가기 전에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클라라와의 관계를 시작한다. 클라라는 육체적인 욕망과 함께 어머니같은 모성으로 빅토르를 사랑하고 감싼다. 빅토르는 클라라에게 구원의 인물이다. 동시에 빅토르는 엘레나가 운영하는 자선유아원에 자원봉사로 일하며 집요하게 엘레나에게 접근한다. 결국 엘레나는 다비드가 출장한 사이 빅토르와 관계를 갖게 된다. 다비드에게 고백하는 엘레나, 이에 절망과 분노를 느낀 다비드는 산초에게 아내 클라라가 빅토르와 관계하고 있음을 고자질한다. 빅토르의 빈 집에서 마주친 산초와 클라라 두 불행한 부부는 결국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죽음을 맞이한다. 다비드는 엘레나를 이해한다면서 혼자 떠나고, 빅토르와 엘레나는 함께 살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은 빅토르의 아내가 된 엘레나가 진통을 느끼고 마드리드 거리에서 아기를 낳는 장면이다. 빅토르의 탄생과 빅토르 아들의 탄생 사이에는 26년의 차이가 있는데, 이 세월은 단지 시간의 변화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정치와 거리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삼엄하던 거리는 왁자지껄하고 활기차며 거리가 차들로 꽉차 교통체증이 심한 그런 거리고 변했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같은 대비를 통해 프랑코 정권치하에서 태어난 빅토르보다 빅토르의 아들 세대는 훨씬 더 자유롭고 희망이 있는 시대에 태어났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라이브 플래쉬>는 과감하고 원색적인 색깔들, 기괴한 성적인 아이디어들로 가득찼던 알모도바르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 매우 순하고 이야기전개 또한 친근한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여전히 감각적이고 현란한 알모도바르 스타일의 흔적은 남아있다.

추신: 1951년생인 알모도바르는 16살 때 영화를 만들고 싶어 혼자 무작정 마드리드로 상경했지만 프랑코 정권에 의해 영화학교가 이미 문을 닫아 12년간 마드리드 전화회사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70년대를 보냈다. 그런 암울한 시대에 청년기를 보낸 알모도바르가 스페인사회에 대해, 또 세상에 대해 어둡고 비틀린 세계관을 가졌을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라이브 플래쉬>에서는 그런 사회성 보다는 세계가 예측불허의 욕망에 의해 지배된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이 많이 나아졌다는 그의 희망과 낙관은 세월의 변화가 가져다준 것일까, 아니면 그의 성공적인 삶이 가져다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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