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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쪽지] 백암 선생이 왕양명 일대기 쓴 까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또 한 해가 저뭅니다. 올해는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여러가지로 어수선했어요. 특히 천안함 피폭-북한정권 3대 세습-연평도 도발…. 우리 국회에서 벌어진 ‘혈투 활극’은 어수선함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듯합니다. 우리 의원들이 왜 그런 방식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는지 궁금한데, 나라가 망하던 100년 전엔 어땠을까요. 이번주 출간된 『왕양명실기』(박은식 지음, 이종란 옮김, 한길사, 464쪽, 2만5000원)는 100년 전 지식사회의 한 풍경을 연상케합니다.

 『안중근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쓴 독립운동가 백암 박은식(1859~1925) 선생의 저서예요. 나라가 망하던 해에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 일대기를 쓴 겁니다. 한가해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왕조 600년을 지탱한 이데올로기는 주자학이었죠. 그걸 비판하는 겁니다. 하지만 늦었어요. 나라가 이미 기울대로 기울었죠. 그런데도 당시 육당 최남선의 ‘소년’지에 실린 백암 선생의 글은 일제에 의해 판매금지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 글이 100년 만에 다시 요즘 글로 첫 완역돼 나왔다고 하니 그 의미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백암 선생 역시 본래는 주자학 전문가였어요. 그러다 바꾼 겁니다. 일종의 ‘종교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습니다. 양명학은 주자학을 탁상공론이라 몰아세웠고 지행합일을 강조합니다. 그게 조선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거겠죠. 앎과 행동을 일치시키라는, 일상적 경구네요. 평범하지만 결코 쉽지않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배영대 학술·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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