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찾아서] 100년 전 이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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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대한제국아 망해라
윤효정 지음
박광희 편역
다산초당
420쪽, 1만8000원

구한 말, 전라 보성군 어느 부잣집 개 이름이 ‘황발이’였다. 당시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했는데 이를 중개하는 남자가 부자 이름이 황발이인 줄 알고 관료를 꼬드겨 황발이에게 ‘감역관’이라는 벼슬을 내리게 하고는 부잣집에 찾아갔다. 벼슬 받은 대가 5500냥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에 개 주인은 “덕이 크신 임금님이 가축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으니 내가 벼슬한 것보다 더 큰 영광”이라며 돈을 내주고 개를 ‘황 감역’이라고 불렀다.

 웃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이 일화는 한말 장지연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했던 윤효정(1858~1939)이 쓴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은 그 『풍운한말비사』(국한문 혼용)를 요즘 말로 풀어 쓴 것이다. 나라가 망하길 바라는 국민이 어디 있으랴. 다소 과격하게 붙여진 편역판의 제목은 원 저자인 윤효정이 전하는 구한 말 백성들의 분노를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겠다. 대한제국이 단순히 외부 요인, 즉 일제의 침략에 의해 망한 게 아니라 지배층의 부패로 인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문드러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책은 크게 4부로 나뉘어 있다. 1부 헌종부터 고종까지, 2부 대원군과 민비, 3부 정변과 전쟁, 4부 망국을 주도한 역적들과 독립협회 이야기를 담았다. 자기 욕심만 차리고 백성의 끼니를 돌보지 않는 관료들이 많았다. 고종의 숙부 흥인군도 곳간에서 꿩고기와 동태가 썩어나갈 정도로 백성들을 수탈했다고 한다. 경상도 진주에서 고을 수령의 포악함을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난 민중들은 관가에 쳐들어가 “당신이 못된 아들을 낳아…”라며 수령 어머니까지 끌어내 생식기를 훼손시켰다는 일화도 나온다.

 민비와 대원군의 권력 다툼을 전하는 내용도 교과서와 많이 다르다. 민비는 조선의 국모가 아니라 자기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해 정치 모략을 일삼는 어머니로, 대원군도 정치권력만을 노리는 비열한으로 그려졌다.

 백성들의 시선으로 본 역사인 만큼 내용은 생생하다. 단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그러모았기에 야사(野史)가 갖는 단점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 많고, 격한 감정도 노골적으로 담겼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해 100년 전 혼란에 휘말렸던 세태와 당시 망국의 고통을 겪은 민초들의 삶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지은이는 훗날에 경계로 삼기 위해 책을 썼다고 했다. 이런 지은이의 뜻을 헤아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행간을 살피며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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