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FTA 자유무역 정신 훼손해가며 자동차에 빗장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95호 06면

미국은 3일 오후(현지시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내용을 일방적으로 공개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 홈페이지를 통해서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자동차 관련 합의를 집중 부각했다. 두 나라가 협의해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6일쯤 공식 발표할 예정”이라던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과 론 커크 USTR 대표의 이날 오전 약속은 없던 일이 됐다. 이런 ‘외교적 결례’를 무릅쓴 미국의 돌발 행동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협상이 진짜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란 시각은 적은 편이다. 되레 ‘여론몰이용’ ‘짜고 친 고스톱’이란 분석이 많다.

3일 한·미 FTA 합의, 자동차 주고 쇠고기 지켰다지만

정부 관계자는 “당초 미국 측이 요구한 것과 비교하면 한국이 많이 선방했다”며 “협상 결과가 미국 의회·업계 요구 수준에 못 미치자 이를 상쇄하기 위해 대대적인 여론몰이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일 나머지 협상 결과를 공개하면 우리가 큰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걸 알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재계 관계자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이런 고민을 꿰뚫고 있는 한국 정부가 (미국의) 일방 발표를 사전에 양해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 정·재계는 추가 협상안에 대해 일제히 환영했다. 미 하원 세입위원회의 차기 위원장인 데이비드 캠프(공화당)는 “미국 고용주와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승리”라고 평가했다. 포드의 최고경영자(CEO) 앨런 멀럴리도 “오바마 행정부와 의회가 한·미 FTA 협정안을 바꿔 한국 자동차 시장의 문을 더 열도록 노력한 것에 깊이 감사한다”고 말했다. 포드는 2007년 협상에 대해 미국 자동차 ‘빅3’ 중 가장 거칠게 반발했던 회사다. 그런 포드마저 환영하고 나섰다면 이번 추가협상 결과는 미 재계를 거의 다 만족시켰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미국 쇠고기 수출업자들의 이익단체인 육류수출협회(USMEF) 회장 필립 셍마저 “한·미 두 나라가 매듭지은 FTA는 우리 회원들에게 좋은 뉴스”라며 환영했다.

‘한미 FTA는 더 많은 수출 더 많은 일자리’. 미국무역대표부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 놓은 문구.

오바마, 여론몰이용으로 합의 먼저 공개
USTR이 공개한 내용만 보면 미국은 한국을 상대로 짭짤한 전과를 올렸다. 2007년 합의에선 3000cc 미만 한국산 승용차는 FTA 발효 즉시, 3000cc 초과 대형승용차는 3년 이내에 2.5%의 관세를 없애기로 했지만 이번엔 배기량에 상관없이 발효 후 5년째 해에 관세를 철폐하는 것으로 시기를 늦췄다. 한국 자동차는 FTA 체결로 미국시장에서 경쟁관계인 일본 차보다 가격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 합의로 5년째 해 이후에나 FTA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됐다. 한국산 트럭에 대해서는 당초 10년 동안 25%의 관세를 단계적으로 폐지키로 했으나 이번 합의에선 8년간은 25%를 그대로 유지하고 나머지 2년간 단계적으로 완전히 없애기로 했다.

대신 한국은 미국산 승용차에 대한 8% 관세를 당초 즉시 철폐에서 4년간은 4%만 부과하고 5년째 되는 해에 완전 철폐키로 했다. 트럭에 대한 관세 8%는 당초 합의대로 즉시 폐지하기로 했다. 양국이 승용차 관세철폐 기한을 늦췄다는 점에서 FTA의 ‘자유무역 정신’을 훼손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특히 이번에 새로 마련된 자동차 특별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는 문제조항이다. 농산물 분야를 제외하고 특별한 품목을 별도로 정해 세이프가드를 적용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미국이 한국 자동차의 자국 시장 잠식에 대비해 안전장치를 겹겹으로 마련한 것이다. 일반 세이프가드의 적용기간은 10년이지만 자동차 세이프가드는 관세 완전철폐 이후 10년간 발동할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산 승용차에 대해선 15년간, 한국산 트럭의 경우 20년간 세이프가드를 발동할 수 있다. 더욱이 일부 자동차 제품에 대해선 한번 이상 세이프가드를 적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세이프가드 적용 기간도 한·미 FTA의 일반 세이프가드(3년)보다 긴 4년간 고율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양국은 또 한국으로 수출되는 미국산 자동차의 자가인증(미국 안전규정을 통과하면 한국 안전기준을 충족한 것으로 인정) 허용범위를 연간 판매대수 6500대에서 2만5000대로 4배 이상 상향 조정키로 했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미국산 자동차 차종의 연간 판매대수가 5000대를 넘지 못한다는 점에서 미국 차들은 상당 기간 ‘예외’를 인정받게 됐다.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연비·배출가스 등 환경기준도 한국의 강화된 기준에서 20% 완화되는 기준을 적용받게 된다. 한국은 앞으로 10인 이하 승용차의 경우 연비를 17㎞/L 혹은 CO2 배출기준을 140g/㎞로 강화할 방침이지만 미국 차는 14.6㎞/L 혹은 CO2 168g/㎞만 충족하면 된다.

안전기준이나 환경기준에서 예외를 인정받은 미국산 자동차를 한국 소비자들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관심거리다. FTA 추가협상 과정에서 미국산 자동차의 약점이 공공연하게 드러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한국 소비자들이 이런 점에 주목한다면 자국산 차를 한국에 많이 팔고 싶어했던 미국은 오히려 ‘거꾸로 마케팅(demarketing)’을 한 셈이다.

반면 한국이 얻어낸 분야는 축산과 의약품이다. 한국은 돼지고기 등 미국산 축산물에 대한 관세 철폐시기를 뒤로 미루기로 했다. 의약품 분야에서는 특허권이 완료되기 전 복제약 시판 방지 조치의 적용을 1년 반 이상 유예하기로 했다. 국내 판매약의 90% 정도가 복제약인 것을 감안하면 이번 합의로 국내 의약업계는 일단 안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2007년 합의된 한·미 FTA를 ‘이익의 균형을 맞춘 협상’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3년 만에 추가 협상을 마친 지금, 이익의 균형은 많이 흔들린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한·미 안보동맹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됐다”며 “무너진 이익의 균형만큼 ‘안보비용’을 추가로 지급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