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Special] 따뜻한 기부로 아름다운 부부 ‘션과 정혜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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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일부 직원이 국민 성금(誠金)을 술값과 노래방비로 썼다는 사실이 드러나 시끄럽다. 고사리손에서 나온 100원짜리부터, 지갑이 얇은 직장인들의 자투리 돈까지…. 수많은 ‘나눔의 온기’가 모욕을 당했다. 찬바람 부는 세밑을 앞두고 다시 나눔을 생각할 요즘, 십시일반 모금이 움츠러들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나눔이란 과연 어떻게 보듬고, 키워가야 하는 걸까. 끊임없는 자선과 봉사로 젊은이들에게 ‘닮고 싶은 부부 1위’로 꼽혀 온 두 동반자, 가수 션과 탤런트 정혜영 부부를 만났다.  

글=김준술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션과 정혜영 부부는 ‘더하는 것’으로부터 ‘나눔’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사진을 촬영하는 동안 부부는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웨딩홀. ‘인터뷰를 웬 결혼식장에서 한담’. 고개를 갸웃하며 발을 들였다. 한 남자가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션(본명 노승환·39)이었다. “오늘 여기서 ‘행복한 가정 만들기’ 프로젝트가 있는데 잘 치르게 해달라고요.” 알고 보니 그가 지원하는 결혼식 행사가 있었다. 이런저런 봉사활동과 강연에 짬을 내기 어려워 식장으로 기자를 초대한 것이었다. “요란하고 돈 많이 들어가는 결혼식 말고 조촐하지만 가정의 의미를 살리는 식을 올리자는 거지요.”

● 평소 가정을 강조하던데, 그래서 최근 자선기관 컴패션의 부부 홍보대사로 뽑혔나 봅니다.

 “컴패션은 사실 우리 가족과 함께 쭉 동행해 온 단체죠. 처음 알게 된 건 2005년 여름이었어요. 마침 아내가 첫째 딸 하음이를 가졌을 때였습니다. 다들 ‘조기 교육’을 말하잖아요. 배 속에 있는 아기한테 가장 좋은 교육이 뭘까. 그래 사랑을 알려주자. 이렇게 생각하고 컴패션을 통해 아이들 양육을 지원했어요. 하음이와 저, 아내 명의로 모두 3명을 돕기로 했죠.”

 ※미국인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1952년 한국전쟁 때 ‘전쟁 고아’를 돕기 위해 모금한 것을 시작으로 탄생한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가 컴패션(www.compassion.or.kr)이다. 지금까지 미국인 도움으로 10만 명의 한국 어린이들이 끼니 걱정 없이 공부하고 사회인으로 자랐다. 93년 한국에서 철수한 컴패션은 2003년 다시 발족해 11개국 어린이 8만 명을 후원하고 있다.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된 것이다.

● 아동 후원은 그걸로 끝났나요.

 “원래 저희 부부의 자식 농사 계획이 4명이에요. 당시 태어나지 않은 3명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추가로 후원 아동을 정하기로 했죠. 그러다 2008년 5월 아내가 후원 어린이 클라리제를 만나러 필리핀에 갔어요. 한 달 4만5000원의 돈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생생하게 목격했죠. 집 사는 걸 포기하고 대신 나눔을 늘리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러곤 100명으로 지원 아동을 늘렸어요.”

 ※ 션 부부는 지금도 서울 마포구 청암동의 전세 아파트에서 산다.

● 홍보대사를 하면 연예인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나요.

 “사실 우리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처음엔 손을 내저었죠. 지금처럼 그냥 열심히 도우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계속 제안을 해 주셔서, 그렇다면 제가 순종해야 될 뜻이라고 받아들였어요.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뜻으로 생각했습니다.”

● 올 초 지진이 휩쓸었던 아이티에도 후원 아동이 있다면서요. 요즘 콜레라 창궐로 걱정이 많은 곳인데요.

 “후원 아동 100명 중 6명이 아이티에서 삽니다. 신티치라는 애가 있어요.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도 지진 피해가 가장 심각한 곳에 살았죠. 생사가 궁금했는데 연락이 안 됐어요. 3월에 살아있다고 연락이 왔죠. 짐을 챙겨 4월에 아이티로 갔어요. 모조리 폐허가 돼 있더라고요.”

● 거의 전쟁터 분위기였으니, 아이들은 끼니 해결도 어려웠겠군요.

 “대통령궁 바로 앞에 빈민 텐트촌이 있어요. 동행한 사진작가가 들어가더니 진흙 쿠키를 사왔어요. 그걸 달라고 아이들이 10여 명이 붙어서 계속 따라오는 겁니다, 글쎄. 말이 됩니까. 2010년 지금 이 순간에 진흙 과자를 먹는 아이들이 있다는 게. 후원 아동은 아니었는데 한 어린이 손을 잡고 텐트에 데려다 줬어요. 우리 일행에게 아이티 말로 이렇게 얘기했대요. ‘저 백인이 우리를 참 많이 사랑해준다’고요. 많은 사람이 사랑과 나눔을 얘기할 때 뭔가를 줘야 한다,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죠. 그러나 어떤 때는 손만 꼭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그걸 실현할 수 있는 겁니다.”

● 지갑에서 내 돈 꺼내서 남을 돕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도 원래 생각 정도는 있었지만 구체적 실행 계획 같은 건 없었어요. 가수 활동을 하면 한번에 목돈이 들어오곤 해요. 쓸 것보다 많으면 조금씩 나누고 그랬죠. 하지만 단발적으로 도움 주는 게 많았어요. 그러다 결혼을 하면서 ‘정말 행복한 가정’이 뭘까 고민하다 나눔을 삶의 일부분으로 만들어보자고 결심했어요.”

● 가정이 나눔의 뿌리가 됐다는 건데요, 정혜영씨도 흔쾌히 동의했나요.

 “(정혜영) 네, 물론이죠”.

● 나눔 활동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 자선 활동하면서 행사에 많이 나가고, 모델 활동도 많은데요.

 “색안경 끼고 보는 이들도 있긴 합니다. 처음엔 더 많았죠. 결혼하면서 남들 돕고 이런 것도 벌써 6년입니다. 지금은 많이 줄었어요. 저희 부부가 하는 일은 ‘이미지 메이킹’ 때문이 아닌 거죠. 살면서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겁니다. 삐딱한 안경이라면 모든 게 다 그렇게 비칠 거고요.”

● 그래도 요즘엔 내 것을 챙기는 풍조가 더 세지 않습니까.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나눔이란 거 말이죠. 제가 생각하는 나눔은 ‘나중에 넉넉하면 하겠다’ 이런 건 아닙니다. 성공하고 나서 베풀지 않겠다는 사람은 없잖아요. 나눔은 크고 작음의 구별이 없어요. 나눔은 그냥 나눔인 거죠. 100원도 그렇고, 1억원도 그렇고. 하루에 1만원씩 모아서 결혼기념일에 노숙자 식사 지원을 해요. 매일 모으니 쏠쏠한 재미도 있고요.”

● 작은 것이 일상이 되고, 큰 나눔으로 자란다는 뜻인가요.

 “저도 하루에 1만원으로 시작했기에 지금처럼 돕는 게 가능했던 같아요. 처음부터 큰돈으로 시작했다면 여기까지 못 왔겠죠. 노숙자 밥퍼 행사에 처음 갔는데 1500명이 왔어요. 그분들 식사에 드는 비용이 총 150만원이었어요. 제가 하루에 만원씩 1년을 모으면 1500명이 두 끼를 해결할 수 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 집에서 애들한테도 나눔을 가르칩니까.

 “경쟁사회라 내 것, 네 것만을 따지기 쉽죠. 트위터에서 충격적인 얘기를 봤어요. 아파트에서 어떤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선생님이 지나가는 아이들 얘기를 들었더니 ‘이제 집값 떨어지겠다’고 하더라는 겁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사랑이 빠지면 공허해지는 거죠. 저는 아이들이 성인이 돼서 살아갈 때 주변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 그래도 막상 애들 학교며 유치원 보내면 엄마 마음이 흔들릴 텐데요.

 “(정혜영) 사실 아이 친구들 엄마 얘기를 들어보면 ‘내가 정말 이렇게 키워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러나 결국 남편을 보면 그 마음 흔들리지 말라고 북돋워주죠. 지금 애가 3명인데 아이들에게 ‘유치원에서 뭘 배웠어’라고 묻지 않아요. ‘뭐 하고 놀았어’라고 하죠. 이게 우리 부부가 애들과 얘기하는 방식이에요.”

● 각종 조사에서 젊은이들이 션 부부를 ‘롤 모델’로 꼽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역으로 생각하면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란 걸 잘 못 느끼고 살기에 그렇지 않을까, 이런 느낌이 들어요. 큰 목표만을 따지고 살다 보면 놓치는 게 많습니다. 큰 집을 사야겠다 이러면 그 집만 가지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것만 추구하다 잃는 게 있을 수 있죠. 아이들과의 시간 이런 걸 말하는 겁니다. 저희 부부도 처음엔 ‘이렇게 살겠다’ 마음먹고 체계적으로 따라간 게 아니었어요. 아이들과 시간 보내고, 부부끼리 비비며 살고 그런 게 모이고 6년이 지나니 지금의 모습이 된 거죠”.

● 혜영씨도 동의합니까. 뭐 특별한 비결이 있을 것 같은데요.

션과 정혜영 부부.

“비결 같은 건 따로 없어요. 그냥 표현하고 그러는 거죠. 마음에 있는 것을. 옛날엔 닭살 애정 표현을 하는 남자들을 공공의 적으로 취급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남편이 강연 다니면 ‘너무 멋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분들이 많아요. 연애하면서 남편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들 돕는 걸 자주 봤어요. 원래 저는 그러지 못했거든요. 저도 남편의 삶 속에서 변한 거죠. ‘상승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 부부의 화려한 사진 이면에 담긴 고생담 같은 건 없습니까.

 “제가 가수로 활동했지만 정말 힘들게도 살아 봤어요. 돈 한 푼이 없어 밥도 못 먹고, 어디를 가려 해도 버스비가 없던 시절도 있었죠. 미국에 있다 한국에 왔을 때 그랬어요. 친구가 돈을 좀 주면 그걸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고요. 1993년부터 97년 가수 데뷔 전까지 그랬습니다. 원래 열한 살 때 괌으로 이민 가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을 때도 친구 집에서 살면서 막노동과 식당일로 생계를 꾸려갔죠. 그래서 없는 마음이 어떤 건지, 조금이라도 누구를 도와줬을 때 그게 뭔지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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