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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물리학상 아깝게 놓친 김필립 교수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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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 뉴욕 시간으로 11월 29일 오후 7시40분, 컬럼비아대 김필립(43·물리학·사진) 교수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저녁을 먹고 강의하러 다시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밤 10시쯤 돼서야 그는 연구실로 돌아왔다.

 기존 반도체 물질보다 가벼운 데다 휘어지기까지 하는, 구리보다 100배 이상 전기가 잘 통하는 신물질 그래핀은 물리학의 첨단 분야다. 김 교수는 그래핀의 주요 물리적 특성 세 가지를 모두 밝혀낸 유일한 인물이다. 지난 10월 그래핀 분야의 선구자 두 명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김 교수의 이름은 없었다. 여러 반론이 터져나왔다.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는 지난달 24일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노벨물리학상위원회도 실수를 인정했다. 김 교수에게 이에 대한 심경을 물었다.

 -위원회가 실수를 인정했다.

 “결정적 실수는 아니다. 문서를 작성함에 있어 편집상의 오류를 인정한 것뿐이다. 받을 사람이 받았다.”

 -김 교수의 기여도가 수상자를 압도한다는 평가도 있다.

 “기여도를 어떻게 보느냐엔 차이가 있다. 노벨상은 ‘최초의 기여자’를 우대한다. 수상자의 첫 논문이 나를 비롯한 여러 후발자에게 도움을 줬다.”

 -남 얘기 하듯 한다. 다시 못 올 기회 아닌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한 자리가 비어 있기에(3명까지 공동수상) 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과학자의 최종 목적이 상은 아니다. 연구 과정을 통해 많은 걸 배웠다.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모교인 서울대는 격앙된 반응이다. 물리천문학부는 지난달 29일 ‘김 교수가 공동수상자로 선정됐어야 한다’는 공식입장을 내놨다. 김 교수는 서울대에서 석사까지 했다.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이 기초학문을 홀대한다는 비판이 있다.

 “응용(돈)과 관련된 연구가 아니면 연구비를 타기가 쉽지 않다. 기초학문의 연구 제안서에 ‘시장성’을 반드시 넣어야 할 때가 많다. 기초학문의 시장성은 바로 나오지 않는다.”

 그는 기초학문을 하나의 문화라고 정의했다. 좋아하는 학문을 자기 나름의 스타일로 뚝심 있게 공부하고, 사회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는 문화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기초학문에 대한 우리의 문화가 아직 성숙되지 않은 현실에 대해 얘기했다.

강인식 기자

인터뷰 전문

미국 뉴욕 시간으로 29일 저녁 7시40분, 컬럼비아대 김필립(43ㆍ물리학) 교수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저녁을 먹고 문제 풀이 수업을 하러 학교에 다시 가야한다고 했다. 물리학과 관련한 여러 문제를 풀어주는 강의는 정규수업이 아닌, 따로 시간을 내서 한다고 했다. 낮엔 연구로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집은 학교와 걸어서 10분 거리. 그의 일상은 연구와 강의로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밤 10시쯤 그는 집이 아닌 연구실로 돌아왔다.

기존 반도체 원료물질보다 가벼운데다 휘어지기까지 하는 물질, 구리보다 100배 이상 전기가 잘 통하는 신물질 그래핀은 현대 물리학의 첨단 분야 중 하나다. 김 교수는 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김 교수와 같은 분야인 탄소 나노물질을 연구하는 서울대 국양(2007년 국가석학) 교수는 “그래핀의 주요 물리적 특성 3가지를 모두 밝혀낸 유일한 인물이며, 이 분야에서 노벨상이 나온다면 그가 탈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10월 그래핀 분야의 선구자 두 명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김 교수의 이름은 없었다. 여러 반론이 터져나왔다. 영국의 세계적 과학학술지 네이처는 24일자 온라인판에서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 노벨물리학상위원회는 실수를 인정했다.

-노벨상위원회에서 실수를 인정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결정적 실수는 아니다. 문서를 작성함에 있어 편집상의 오류를 인정한 것 뿐이다. 받을 사람이 받았다.”

-학계에서는 김 교수의 실질적 기여도가 수상자를 압도한다는 평가도 있다.

“기여도를 어떻게 보느냐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노벨물리학상의 오랜 철학은 ‘최초의 기여자를 우대한다’는 데 있다. 수상자들의 첫 논문이 나를 비롯한 여러 후발자들에게 도움을 줬다.”

-남 얘기하 듯한다. 아쉽지 않나.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상을 준다는 데 안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게다가 노벨상인데. 한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노벨상은 3명까지 공동수상이 가능), 그 자리가 내 것이 될 수도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한 분야에 두번 노벨상을 주진 않으니까…. 몇 년 전부터 한국에 가면 ‘노벨상에 근접한 학자’란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최초 기여자와 나는 어느정도 갭이 있다. 연구가 더 진행된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현 시점에서 볼 땐 차이가 분명하다. 만약 수상자가 갈린다면 두 사람으로 압축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래핀 분야의 노벨상 수상이 생각보다 빨리 이뤄졌다. 그래서 난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리했다.”(서울대 오세정 물리학과 교수는 그래핀에 관련된 노벨상 수상이 몇년 뒤에 있었다면, 김 교수의 수상이 더 유리했을 거라고 진단했다. 오 교수에 따르면 그래핀의 상용화에는 시간이 더 걸리며, 그를 위해선 여러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 그 과정에서 김 교수팀은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한국에선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고 있다.

“과학자의 최종 목적이 상은 아니다. 연구 과정을 통해 많은 걸 배웠다.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미국 조지아텍 대학의 월터 드 히어 교수는 이번 수상자 선정이 잘못됐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네이처의 기사도 그로 인해 가능했던 거 아닌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첫 논문이 그래핀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나도 그의 말을 듣고 꼼꼼히 논문을 살펴봤다. 하지만 수상자들은 분명히 그래핀의 합성에 관한 아이디어를 논문에서 제공하고 있다. 수상자들은 ‘스카치 테이프’를 이용해 탄소 구조에서 처음으로 그래핀을 분리해 냈다. 아주 단순하지만 창의적 방식이었다. 당시 우리 연구팀은 다른 방법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과학에는 운도 작용한다. 최초의 발견(합성)은 쉬운 일이 아니다. 드 히어 교수가 더이상 문제 제기를 안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상이 되돌아오진 않으니까.”

김 교수는 침착했다.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없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말은 ‘그런 평가가 있다’는 식으로 순화해 말했다. 그러나 모교인 서울대는 격앙된 반응이다. 물리천문학부는 29일 ‘김 교수가 공동수상자로 선정됐어야 한다’는 공식입장을 내놨다. 김 교수는 서울대에서 물리학 석사까지 했다.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컬럼비아대에 임용됐다. 물리학계의 한 교수는 “미국이나 일본이었다면 해당 학계의 저항 때문에 국제적인 파문이 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가 일본인이라면 수상에 문제가 없었을 거란 주장도 있다.

“적어도 물리학 분야만큼은, 정치적 결정이 배제돼 왔다고 나는 믿는다. 일본은 100여 년 전, 현대물리학의 태동기때부터 연구에 참여해 왔다. 기초학문의 저력을 우리와 비교할 순 없다. 학문의 저력을 정치적인 이유(국력)로만 설명하는 건 위험하다.”

-이번 논란을 통해 많은 걸 생각했을 거 같다.

“나는 최고의 학생이 아니었다. 교수님에게 ‘두 번 말해도 이해 못하는 학생’이란 말도 들었다. 나보다 똑똑하고 창의적인 분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 내가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고, 이렇게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에 스스로 많이 놀랐다. 참 재미있다는 생각도 했다. 이런 논란 자체가 한국이 노벨상에 좀더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언젠가 수상자가 나올 것이다. 과학엔 역사가 필요하다.”(서울대의 한 교수는 향후 10년 안에 김 교수와 같은 강력한 후보는 나오기 힘들다고 전했다. 10년 안에 상을 받으려면 이미 세계적 스타가 돼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인물이 김 교수뿐이었다는 진단이다. 김 교수는 미래에 노벨상을 받을 인물이 커가고 있다고 했다.)

-한국의 기초학문 홀대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도 많이 좋아지고 있다. 발전하는 속도로 따지면 상당히 고무적이다. 한국에서 연구한다고 해도 여건 면에서 크게 뒤질 건 없다고 본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점도 있다. 응용(돈)과 관련된 연구가 아니면 연구비를 타기 쉽지 않다. 기초학문의 연구 제안서에 ‘시장성’을 반드시 넣어야 할 때가 많다. 아이러니다. 기초과학은 단번에 돈이 되지 않는다. 기초 학문의 효용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돈이 안되는 천문물리학이나 소립자물리학은 더 어려움을 겪는다고 들었다. 기초학문은 한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미국에서 공부하며 기초학문에 관한 성숙한 문화를 느낀 적이 있나.

“자기가 좋아하는 학문을 자기 나름의 스타일로 뚝심있게 공부하는 이들이 미국엔 많다. 즐거우니까 공부하는 인재들이 많다는 것이다. 당장 성과를 못 내더라도, 사회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준다. 부러운 부분이다.”

-그래핀 분야에서 물리학상이 나왔다.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

“노벨상이 나왔으니, 그래핀 분야에서 기초과학의 역할이 어느정도 정리될 것이다. 앞으로 그래핀 연구는 보다 체계화 될 것이다. 이를 응용한 공학 분야의 연구도 활발해지리라 믿는다. 나도 이 과정에서 도전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면 또 다른 분야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1등은 모두 의대로 가려 한다는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의 푸념이 떠올랐다. 과거 전국 1등은 물리학과나 화학과 등 기초학문을 선택하던 시절이 있었다. 학문에 대한 우리의 문화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게 아닌가. 김 교수는 이런 우리의 현실을 얘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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