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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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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소영
도쿄 특파원

아버지 전근을 따라 해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 당시 조국은 늘 가난하고 불안한, 때로는 도망치고 싶은 존재였다. 해외 TV에 나오는 조국의 현실은 “남한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느니 “곳곳에서 땅굴이 발견되고 남한에서 활개 치던 북한 간첩들이 붙잡혔다” 같은 어두운 소식 일색이었다. 광주시민들이 군경과 대치하며 유혈시위를 벌이는 TV 보도를 보면서도 처음엔 “동남아의 작은 나라에서 폭동이라도 일어난 모양”쯤으로 생각했다. “정말 우리나라에 전쟁 나는 건 아니냐”는 걱정스러운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기 전까지는.

 그 후로도 해외에서 한국인이기에 겪어야 했던 크고 작은 갈등은 계속됐다. “한국이란 나라는 지도상에 어디에 있느냐”는 일본인 친구들 말에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바로 여기. 너네 나라 바로 옆”이라고 가르쳐 줬던 건 약과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지자 일본에선 김대중 구명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김대중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런 내 앞에 짓궂은 같은 반 남자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긴다이추(金大中)를 석방하라!”고 외칠 땐 정말이지 울어 버리고 싶었다.

 사반세기의 시간이 지나 어른이 돼 다시 일본에 왔다. 일본 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로 바뀌어 있었다. 단순히 서울올림픽을 개최하고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한 나라라는 평가 이상이다. 한류 드라마와 영화가 판을 치고, 한국의 음식·전통·문화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일본인 납치 문제라든지 미사일 위협을 하는 북한은 여전히 일본 사회의 불안요인이지만 북한과 한국은 엄연히 다른, 동일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게 일본 내 정서였다.

 적어도 23일 연평도가 불바다가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과거 수없이 한반도 유사시 상황을 가정하고 대응해 왔던 일본이지만 북한의 포탄이 연평도 민가에 떨어지는 ‘전시 상황’을 지켜본 충격은 적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본인을 끌고 가고 테러를 자행하는 골치 아픈 나라”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이번 연평도 포격은 북한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확고히 굳히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됐다. 동시에 한국과 북한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돼 버렸다. 한국이 일본에 앞서 해외 원전사업을 수주하고 정보기술(IT) 강국으로서 입지를 굳힌들 무엇하랴. 북한의 위협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은 아프간이나 이라크 같은 늘 불안한 전시체제의 나라일 수밖에 없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우리의 생명과 재산이 북한의 공격으로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무력감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다. 자국민 보호라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고해와 반성 같아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 외국에서 한국인으로 살고 있는 내 아이들이 어릴 적 나와 똑같은 고민과 갈등을 하게 될까 두렵다.

박소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