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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21)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밝은 눈 1

운악산에서 흘러나온 관음봉(觀音峰)은 서북방향으로 급경사를 이루다가 다시 솟아 곧 세지봉(勢至峰)으로 이어졌다. 도시의 북쪽을 감싸고 있는 게 관음봉이라면 도시의 서쪽을 둘러친 게 바로 세지봉이라 할 수 있었다. 세지봉은 관음봉보다 조금 높지만 비교적 경사가 완만해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쉬웠다. 일주도로도 나 있었고, 배드민턴 장을 비롯한 체육시설이 주로 자리 잡은 곳도 바로 세지봉 주변이었다. 관음봉은 세지봉에 비해 암벽투성이였고 절벽이 많았으며,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일찍부터 특수부대가 사격장과 훈련장으로 쓴 것도 사람의 발길이 드물어진 한 요인이 됐다. 늘 사람의 자취가 없었다.

내게는 그것이 더없이 다행스런 일이었다.
나는 틈만 나면 관음봉 곳곳을 헤매고 다녔다. 사람이 많은 세지봉엔 가지 않았다. 관음봉은 종일 쏘다녀도 인적이 드물어 좋았다. 특수부대 유격훈련도 대부분 비어 있었다. 철조망에 접근금지라는 패찰이 붙어 있었지만 군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나는 급경사를 달리기도 했고 맨손으로 암벽을 타기도 했다. 나의 체력과 등반기술은 거의 옛날 수준을 회복했다. 체력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시력과 청력도 좋아진 것 같았다. 병원에서 재본 적은 없었지만 분명히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고 전에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렸다. 이를테면 밤 깊었을 때 건너편 방에 사는 슈퍼마켓 남자의 숨소리를 선명히 듣기도 했다. 한 달 전에만 해도 없었던 현상이었다.

내가 관음봉 진짜 사령관이다!
자랑스럽게 혼잣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특수부대 철조망과 암벽 사이의 좁고 위험한 벼랑 끝을 지나다가 전에 보지 못한 어떤 건물들을 발밑에서 발견한 것은 가을이 완전히 기운 다음이었다. 관음봉과 세지봉이 만나는 협곡이었다. 아담한 연못을 중심으로 배치된 건물은 큰 것과 작은 것을 합쳐 여러 채였다. 사람이 터 잡고 살기 어려운 급경사를 따라 지어올린 건물들이었다. 가강 낮은 곳에 연못이 있었고 정자도 있었다. 벼랑으로 둘러싸인 곳으로서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절인가, 하고 생각했다. 내가 이곳에 살던 젊은 시절엔 분명히 없었던 건물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벼랑은 육칠십 미터 높이에 이르렀는데 층을 이루고 있었다. 보통사람은 내려갈 수 없겠지만 나로선 맨손으로 하강이 가능한 정도였다. 건물을 둘러싸고 꽤 높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내가 망설인 것은 높은 울타리가 주는 어떤 배타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건물을 둘러싼 그 울타리가 또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만의 세상이라고 여겼던 관음봉이 은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미상불 기분은 좋지 않았다. 틈입당한 느낌이었다. 내려갔다가 나갈 곳이 없다면 다시 올라오면 될 일이었다. 나는 암벽의 에지(edge)를 골라잡으며 곧 벼랑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혼자 암벽등반을 즐기는 솔로 클라이밍은 원래 내가 좋아하는 등반방식이었다. 삽시간에 오십여 미터를 내려왔다. 선반처럼 튀어나온 테라스가 나왔다. 나는 일 미터쯤 되는 암벽과 암벽 사이의 테라스에 앉아 잠시 가쁜 숨을 골랐다.

연못이 바로 앞에 있었고 연못 옆은 주차장이었다.
잎이 다 떨어진 잡목들 가지 사이로 연못과 주차장, 그리고 기와지붕을 얹은 헌칠한 전각이 보였다. 공사 중인지 너른 주차장 한켠엔 몇몇 트럭과 포클레인도 있었다. 그때 차 소리가 났다. 차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나는 주차장과 전각의 입구를 환히 볼 수 있었지만 주차장이나 전각에선 당연히 잡목 뒤의 내가 보이지 않을 터였다. 곧 고급승용차가 한 대 주차장으로 들어왔고, 전각 왼편 건물에서 서너 명의 남자가 뛰어나왔다.

아니 저들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미간을 잔뜩 모았다.
앞서 뛰어온 두 사람은 분명 샹그리라 502호실에 사는 남자들이었다. 관리인이라고 내가 자기소개를 했을 때에도 쓱 한번 돌아보았을 뿐 무기물의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해서 나를 기분 나쁘게 했던 두 남자를 빨리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보다 몇 걸음 뒤에 따라 나온 다른 남자 때문이었다. 501호실 백주사가 그들을 뒤따라 나왔다. 차 문이 열렸다. 잘 차려입은 중년부인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백주사가 두 손을 합장한 채 고개 숙여 부인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어 502호실 남자 중 땅딸한 남자가 차의 뒷좌석에서 누군가를 부축해 내려 등에 업었다. 뼈만 남은 듯한 노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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