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전 가능성 작고 중국이 움직일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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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호 22면

확증파괴(Assured Destruction)는 군사용어다. 상대를 확실하게 파괴한다는 의미다. 냉전시대엔 ‘상호(Mutual)’라는 말이 더해져 상호확증파괴(MAD)란 용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미국과 옛 소련이 상대를 핵으로 공격하면 핵으로 보복받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평화가 유지된다는 뜻이다.

외국인들 연평도 포격 때 주식 사들인 까닭

그런데 무시무시한 확증파괴라는 말이 이머징 투자의 귀재 입에서 흘러나왔다. 주인공은 마크 파버(64)다. 파버는 홍콩의 마크파버투자자문 회장이다. 그는 연평도 포격전 이틀 뒤인 25일 중앙SUNDAY에 보낸 e-메일 코멘트에서 “남한과 북한 어느 한쪽도 상대를 확증파괴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갈등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남북한 어느 한쪽도 확실하게 상대를 제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전면전 또는 제한적인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작아 보였다는 얘기다. 파버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그날 인식(Perception)이 그래 보였다”고 덧붙였다. 외국인들이 포격전 하루 뒤인 24일 무엇을 생각하고 한국 주식을 사들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날 외국인들은 한국 주식 189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국내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이 사들인 규모는 4516억원어치였다. 기관투자가들과 외국인들이 북한 공격에 놀란 개인 투자자들이 내던진 5799억원어치의 주식을 거의 다 받아 낸 셈이다. 종합주가지수(KOSPI)는 장 초반 가파르게 추락했다가 빠르게 회복했다. <그래프 참조>

국내 연기금 등은 정부의 입김이 작용할 수 있는 플레이어들이다. 24일 장 마감 이후 여의도엔 주가 급락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부가 연기금을 동원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반면 외국인은 한국 정부의 입김이나 바람이 작용하지 않는 플레이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셈법과 잇속에 따라 움직인다. 포격전 이후 외국인 돈의 움직임이 주목받는 이유다.

파버는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7년 미국 주택시장 붕괴를 예측했다. 그가 원조 ‘닥터둠’으로 불린 까닭이다. 그만큼 위기를 감지하는 후각이 예민하다는 평이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위기를 경고하는 바람에 그의 투자 의견이 상당 기간 무시당하거나 외면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날 파버의 설명은 다른 외국 전문가들과도 일치했다. 마크 모비우스(74) 템플턴애셋매니지먼트 회장은 중앙SUNDAY를 위한 e-메일 코멘트에서 “과거 예에 비춰 남북한 긴장은 결국 해소됐다”고 말했다. 모비우스는 이른바 학습효과를 강조한 것이다. 또 그는 “과거의 예에 비춰 일시적인 하락은 주식을 싸게 사들일 수 있는 기회였다”고 덧붙였다.

외국인 투자자 가운데 가장 발 빠르게 의견을 내놓은 인물은 마이클 하센스타브 프랭클린템플턴 채권펀드 대표 매니저다. 그는 북한의 포격 당일 곧바로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는 “남북한 사이에는 많은 긴장이 발생했다”며 “남북한 어느 한쪽도 긴장이 고조돼 지속되는 일을 바라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센스타브는 세계 넘버 2로 떠오른 중국의 존재를 의미 있게 봤다. 그는 “중국은 북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며 “중국이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일을 바라지 않을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 긴장이 고조됐을 때 중국은 북한을 움직여 대화에 나서도록 하는 능력을 보여 줬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경제 체력(펀더멘털)을 강조했다. 한국이 금융위기에서 가장 빨리 벗어난 나라이고 실업률이 낮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 견줘 재정이 상당히 건전한 점을 강조했다. 연평도 포격전만으로 한국 경제에 대한 긍정적인 판단을 바꿀 단계는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외국인들의 컨센서스는 26일에도 재확인됐다. 이날 국내 개인 투자자들은 항공모함까지 동원된 한·미 군사훈련이 남북 사이 긴장을 높일 것으로 보고 장 후반에 주식을 대거 팔아 치웠다. 그런데 외국인들은 541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포격전 다음 날인 24일(189억원)보다 2.8배나 많은 규모다. 한반도 정세를 놓고 국내 개인 투자자와 외국인이 정반대 베팅을 한 셈이다. 국내 개인 투자자는 매도 포지션을, 외국인들은 매수 포지션을 취했다.

남북한의 자잘한 충돌을 늘 있는 일로 보는 외국인들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오랜 세월 남북 관계의 부침을 경험한 국내 개인 투자자들의 위기 감지 능력이 정확한 것일까.

전문가들은 ‘1912년 발칸 패닉’을 주목했다. 그 시절 발칸반도 안팎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 해 전인 11년엔 이탈리아와 터키가 전쟁을 벌였다. 세르비아와 터키 사이에도 크고 작은 군사충돌이 벌어졌다.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 증시의 참여자들은 처음에 긴장하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무덤덤해졌다. 당시 양쪽의 배후 세력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전면전을 원치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결과는 확전이었다. 12년 10월 8일 세르비아-불가리아 연합군이 러시아 지원을 믿고 터키를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다. 확전 가능성을 작게 봤던 런던과 뉴욕의 투자자들이 채권과 주식을 내던졌다. 값이 폭락했다. 당시 영국 정치인인 노먼 에인절(33년 노벨 평화상 수상)은 “유럽 강대국들이 전쟁을 선언해 지금처럼 증시가 붕괴하면 전비 조달 길이 막혀 더 이상 싸움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투자자들은 상황이 예측과 다르게 흐르면 더 깊은 패닉의 심연에 빠지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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