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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외교관 망명 막으려 인민군서 대사 차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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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호 29면

1955년 5월, 반둥회의를 마치고 자카르타 주재 중국대사관에서 관원들과 함께한 총리 저우언라이(밑에서 둘째 줄 한가운데 넥타이 맨 사람)와 부총리 천이(저우언라이 왼쪽). 김명호 제공

1949년 1월 19일, 내전 승리를 앞둔 마오쩌둥(毛澤東)은 외교문제에 관한 세부사항들을 중공 중앙위원회에 서면으로 지시했다. 말미에 “중국은 독립국가다. 그 어떤 국가나 연합국(유엔)의 내정간섭을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 중국 경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중국 인민과 인민의 정부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구(舊) 중국의 굴욕외교와 확실한 선을 그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92>

10월 1일 사회주의 중국을 선포하는 자리에서도 “본 정부는 전국 인민의 유일한 합법정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한다. 상호 평등과 쌍방의 이익을 준수하고, 영토주권의 원칙을 존중하는 국가들과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마오의 외교정책은 부뚜막을 새로 만들고, 집안을 깨끗이 청소한 후에 다시 손님을 초대하고, 사회주의 일변도(一邊倒)를 견지한다는 세 가지였다.

1949년 3월 허베이(河北)성 시바이포(西柏坡)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7차 2중전회에서 신중국 외교방침을 선언하는 마오쩌둥.

신(新)중국 선포 1개월 후인 11월 18일, 북양정부 외교부 소재지였던 ‘둥단구(東單區, 현재의 東城區) 외교부가(街) 31번지’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현판식이 열렸다. 판공청(辦公廳) 주임 왕빙난(王炳南)이 성립대회를 주재했다. 부(副)부장 리커농(李克農)이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소개했다. 저우의 인사말은 훈시라기보다 덕담 수준이었다. “모든 기관이 성립대회를 연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이게 바로 형식주의다.” 회의장에 폭소가 터졌다. “리커농 부부장의 착오를 수정하겠다. 나는 외교부장이다. 앞으로 외교부 사람들은 나를 총리라 부르지 마라. 부장이라고 불러라.” 저우는 국무원 총리와 외교부장을 겸하고 있었다.

신중국 외교부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저우언라이가 사무용품을 새로 구입하
지 말라는 바람에 북양정부가 쓰던 비품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자동차도 없었지만 자전거 하나만은 당시 최고급이었던 봉황(鳳凰)표 20대를 홍콩에서 구입해 타고 다녔다. 대우는 형편없었다. 한 달 봉급 3위안(元), 싸구려 신발 한 켤레 값이었다. 매달 아이스케키나 과자 사먹기에도 빠듯한 돈을 받다 보니 끼니는 모두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다.

해방 초기 가장 흔한 식료품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버터였다. 1년 열두 달 하루도 빠짐없이 좁쌀 밥에 버터를 넣고 비벼 먹던 신중국 초기 외교부 근무자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버터만 보면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4년이 지나자 야채 볶음과 닭고기들이 가끔 나오고 제대로 된 봉급을 받기 시작했다.

외교부는 1년 만에 17개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중 6개는 의식 형태가 완전히 다른 자본주의 국가였다. 영국·파키스탄·노르웨이 등 7개국과도 수교를 위한 회담이 진행 중이었다.
마오쩌둥은 1차로 해외에 파견할 특명전권대사 15명을 인민해방군 지휘관들 중에서 차출했다. 국민당 시절 외교 업무에 종사했던 외교관들이 많았지만 이들을 해외에 내보낸다면 망명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농담이라며 “왜 장군들을 파견하려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이 사람들은 도망갈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번도 빨아 본 적이 없는 두툼한 군복에 짐 보따리를 둘러멘 사람들이 꾸역꾸역 외교부로 몰려들었다. 장정과 항일전쟁, 국공전쟁을 거치며 많게는 10여 만에서 적어도 2만 명 이상의 전투병력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장군들이었다. 개중에는 베이징(北京)을 처음 와 본 사람도 있었지만 평생 주눅이라는 것을 들어 본 적 없는 듯 행동거지에 거침이 없었다. 따라온 부인들의 행색도 남편들과 비슷했다.

저우언라이는 온 몸에서 화약냄새가 가시지 않은 미래의 전권대사와 부인들을 위해 호텔 한 개를 비워놓고 외교부 강당에 ‘대사 훈련반’을 개설했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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