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칼 대신 입으로 싸워라” … 마오, 군 출신 대사 설득 작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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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호 29면

대표적인 장군 출신 외교관 황전(黃鎭)은 화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대사와 프랑스대사, 초대주미연락사무소 소장 등 5개국 대사와 외교부 부부장을 역임했다. 둘째 사위인 외교 담당 국무위원 다이빙궈(戴秉國)도 프랑스대사와 외교부 부부장을 지냈다. 1964년 6월, 엘리제궁에서 드골 프랑스 대통령(가운데)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뒤 기념촬영을 한 중국의 초대 주프랑스대사 황전. 김명호 제공

1950년 봄, 제3야전군 7병단 정치부 주임 지펑페이(姬鵬飛)는 외교부에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왕년의 직속상관 쑤위(粟裕)를 찾아가 군대에 남아 있게 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우리는 장군이다. 국가가 요구할 때 선택할 권한이 없다”는 답을 듣자 군말 없이 베이징을 향했다.
저우언라이의 부름을 받은 제2병단 참모장 겅뱌오(耿飇)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겠다. 외교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어 걱정이다”며 한숨만 내쉬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93>

장정 시절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하던 중앙군사위원회 정치부 주임 황전(黃鎭)은 부인 주린(朱霖:현 국무위원 다이빙궈의 장모)이 축하는커녕 “혼자 나가서 외교관 노릇 열심히 해라. 나는 국내에서 할 일이 많다”는 말을 하자 난감했다. 겨우 달래 이불 보따리 2개와 자녀들을 데리고 외교부에 도착했다.

유격전과 정규전을 두루 거친 한녠룽(韓念龍)과 황포군관학교 1기 출신인 난징(南京)군구 경비사령관 위안중셴(袁仲賢)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작전 지역을 옮겨 다니던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전쟁과 외교를 교묘히 결합시켰다. “여러분은 새로운 전쟁터로 나간다. 외교는 전쟁과 똑같다. 그동안 총칼을 들고 싸웠지만 이제부턴 글과 입으로 싸워야 한다. 작전 지역 이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외교무대가 전쟁터와 같다는 말을 들은 장군들은 그제야 귀가 솔깃했다. 전쟁이라면 자신 있었다. 외국어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들에겐 “우리가 언제 외국어 잘해서 전쟁에 이겼느냐. 상대방이 말할 때 웃으며 고개만 까딱거리면 된다”며 안심시켰다.

가장 중요한 사항 중 하나인 ‘신임장 제정’에 관한 설명은 주린이 “대단한 건 줄 알았더니 소개장이네”라며 한마디 하자 다들 “맞다”고 박장대소하는 바람에 쉽게 끝났다. 따지고 보면 신임장이나 소개장이나 그게 그거였다.

각 방면의 전문가와 학자들이 국제법·연합국헌장·면책특권 등 외교관이 꼭 알아야 될 것들을 주입시키고 신임장·비망록·전보·회담기록 등의 전시회도 열었다. 모두 난생 처음 보고 듣는 것들이었다. 장군들의 시야가 서서히 넓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생활습관이었다. 호텔에 머물며 훈련을 받던 장군들은 아침마다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스프링이 달린 침대는 옷 입은 채로 땅바닥에서 자는 것만도 못했다. 소파는 앉으면 몸이 푹 꺼지고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방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것도 이상했다.

양식 먹는 법과 사교춤은 정말 배우기가 힘들었다. 양복에 넥타이 매고 포크와 나이프질 하자니 숨이 막혀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질 않았다. 두부 한 판과 찐빵 10개를 단숨에 먹어 치워도 탈 난 적이 없었던 장군들은 화장실 드나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쟁 시절 틈만 나면 모여 춤을 췄지만 마룻바닥 위에서 추는 춤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부인들은 더 힘들어했다. 포성 속에서 성장한 전사들에게 파마와 얼굴 화장, 치파오와 굽 높은 신발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예절교육 담당자가 “남편은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외교관 부인은 복장·행동·말투가 남달라야 한다. 남편이나 과거의 동지들이 좀 모자란 행동을 했다고 소리부터 버럭 지르는 교양 없는 행동은 정말 고쳐야 한다”는 말을 하자 분노가 폭발했다.

주린이 “우리는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혁명에 참가했다. 부속품 노릇 하라니 어이가 없다. 이건 모욕이다”며 격앙하자 “대사 부인 하느니 이참에 이혼하고 군부대로 돌아가겠다”는 발언들이 속출했다. 여전사들은 총리 면담을 요구했다.

저우언라이는 부인 덩잉차오에게 도움을 청했다. 덩은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자 생활할 때 치파
오를 입고 나갈 때마다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 뾰족한 신발 신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굴러떨어진 적도 있었다”며 부인들을 진정시켰다.

신중국 초기에 군대에서 차출한 장군 출신 대사들의 평균 연령은 41세였다. 초대 북한대사 니즈량(倪志亮)이 49세로 제일 많았고 불가리아대사 차오샹런(曺祥仁)은 35세로 제일 어렸다. 초대 주소대사 왕자샹(王稼祥)은 여권 없이 모스크바로 부임했다. 만드는 것을 미처 생각 못했는지 아니면 놓고 갔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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