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봉 기자의 도심 트레킹 ⑮ 서울의 국립현충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7면

줄맞춰 있는 묘비 사이로 가을 끝 무렵이 지나간다. 현충원 길마다 색색으로 물든 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김상선 기자]

지레 겁먹지만 않는다면 묘지만큼 걷기 좋은 곳도 없다. 예부터 묘는 명당에 자리 잡아 왔기 때문이다. 하물며 국가에서 마련한 ‘국립묘지’라면 두말할 나위 없다. 이번에 걸을 곳은 국립서울현충원 내외곽이다. 국립묘지이자 나지막한 산, 그리고 커다란 공원인 이곳은 사시사철 매력이 있다. 요즘 같은 늦가을, 낙엽 펼쳐진 길도 무척 아름답다. 지대가 높아 내려다보는 경치가 빼어나고, 깨끗하고 조용해서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머리를 식히기도 좋다. 현충원 둘레는 언덕 오솔길을 걷는 듯하고, 잘 정돈된 현충원 안쪽 길은 수려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곳은 무엇보다 국립묘지. 역대 대통령 3명과 전몰용사, 순직경찰, 애국지사의 묘가 있다. 조금은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걸어야 한다.

글=이정봉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200여 개 계단 오르면 펼쳐지는 한강 풍경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강을 바라보는 관악산 자락에 자리 잡은 명당이다.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이자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형세라 한다. 관악산 줄기에서 한강 쪽으로 은근히 뻗어오다 볼록 솟은 공작봉에 현충원이 터를 펼쳤다. 공작봉은 서달산 혹은 달마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언덕 정도 높이지만 산은 산이고, 봉우리는 봉우리다. 그래서 코스 초반 오르막은 조금 가파른 편이다. 쉬엄쉬엄 걷는 게 좋다. 걷기가 익숙지 않다면 약간 숨이 찰 수도 있으나 등산보다는 걷기 가벼운 편. 그래도 힘이 남는 초반에 조금 고생해두면 중반 이후는 내리막이니 발걸음이 가볍다.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3번 출구에서 시작한다. 역사를 나와 육교에 올라 반대편으로 건너면 왼쪽 계단이 3번 출구, 오른쪽 계단이 4번 출구다. 육교를 다 내려와 길을 따라 30m만 가면 오른쪽 편에 나무계단이 나온다. 자, 이제 오르막 시작이다.

 계단이 꽤 많다. 200개는 될 성싶다. 하지만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는 벤치가 있다. 힘에 부치면 잠시 앉아 기력을 회복하면서 올라가면 된다. 오를수록 한강변이 내려다보이고, 반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르는 데 들이는 힘과 펼쳐지는 경치의 수준은 비례하기 마련이다.

 계단을 다 오르면 흙길이 시작된다. 현충원 담벼락을 따라 걷는 언덕배기 오솔길이다.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지고 종종 벤치, 체력단련기구 등이 등장한다. 걷다 보면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샛길도 꽤 자주 보인다. 샛길은 이수교차로, 사당동, 흑석동으로 이어진다. 이 길은 인근 동네 주민들에게는 예전부터 잘 알려진 산책로다.

 현충원 둘레길은 전형적인 숲길이었지만 태풍 곤파스 때문에 나무가 쓰러져 그늘이 사라졌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경관이 트였다. 여름에 걷기 좋았던 이 길은 올해만큼은 겨울철 따뜻한 햇볕을 받고 동네 풍경을 보며 걷기 좋게 바뀌었다. 하지만 현충원 담장에 걸쳐진 나무들이 그대로 방치돼 있는 점은 걸린다.

 걷다 보면 현충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문이 3개 나온다. 2005~2006년에 시민들이 드나들기 쉽도록 뒤쪽 담장을 텄다. 걷는 방향에 따라 사당동, 상도동, 흑석동 방면 출입문과 순서대로 마주친다. 첫 번째 사당동 방면 문을 지나친 뒤 두 번째 상도동 방면 출입문으로 들어간다. 나무 울타리로 된 길을 지나면 은색 철문이 나온다.

 이 문으로 들어가 현충원 안쪽을 걷는다. ‘성역의 분위기를 저해하는 복장을 삼가 달라’는 표지판이 있다. 선글라스나 슬리퍼 차림으로 걷는 건 곤란하다는 말이다. 이제부터 길 자체는 편안하다. 오르락내리락하던 숲길이 아니라 느긋하게 걸을 수 있다.

 왼쪽으로 난 길을 천천히 내려가다 보면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현충원 안에 있는 절인 호국지장사다. 산에 있어 호젓한 느낌을 자아내는 자그마한 사찰이다. 670년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화장사(華藏寺)였다고 한다. 1984년 국립묘지에 안장된 호국영령의 안위를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호국지장사로 개칭했다. 이곳에서는 신라 말 고려 초 양식으로 지은 서울 유형문화재인 ‘약사불 철상’이 있다. 돌계단 아래 315년 묵은 느티나무도 볼거리다. 절 입구 오른쪽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현충원 안쪽 도로는 대개 아스팔트이고, 차가 다니는 길이지만 차량통행이 많지 않다.

현충원 안팎서 융단처럼 깔린 낙엽 밟으면 …

현충원의 가을은 무르익어,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다. 단풍은 막바지에 올라 미친 듯이 붉은색을 내뿜고 있고, 은행도 제 잎을 떨어뜨려 길을 노란빛으로 수놓았다. 요즘은 길을 따라 낙엽이 카펫처럼 깔렸다. 또 이번 달은 현충원에서 볼 만한 행사가 열린다. 현충원 잔디광장에서 이번 달 한 달간 토요일 오후 3시에 국방부 특별 군악·의장 행사를 연다.

 이번 코스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 묘역, 김대중 대통령 묘역, 이승만 대통령 내외 묘역 순으로 거친다. 안쪽은 표지판이 잘돼 있어 대통령 묘역을 찾아 다니기 쉽다. 특히 대통령 묘역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참배한 뒤 뒤를 돌아보면 현충원 경내, 한강 주변 경치를 볼 수 있다.

 대통령 묘역을 들른 후 다시 길을 거슬러 올라오다 보면 왼쪽으로 뻗은 ‘솔냇길’이 나온다. 표지판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길은 묘비를 병풍처럼 두른 언덕 위에 있는 길이다. 나무 사이로 현충원 안쪽 풍경이 한눈에 내다 보이는 조망점이 군데군데 있다. 길 자체도 은행나무·느티나무 등에서 떨어진 낙엽을 밟는 즐거움이 있다.

 길 끝에 ‘육탄 10용사 현충비’가 나오고 여기서 왼쪽으로 틀어 배롱나무가 심어진 길로 내려온다. 장군교를 건너 오른쪽 정문으로 나가면 코스가 마무리 된다. 정문으로 나오면 바로 동작역 8번 출구가 있다. 현충원의 개방 시간은 동절기라 오전 7시~오후 5시. 전체 코스 길이는 약 6.5㎞, 천천히 걸어도 3시간이면 돌 수 있다(위성 지도 등 자세한 코스 정보는 ‘mywalking.co.kr(발견이의 도보여행)’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