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11) 이 땅 사람들의 생명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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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전쟁 중에 제주도 모슬포로 옮겨온 육군 제1훈련소에서 면회를 신청하고 있는 훈련병 가족. 훈련을 받고 전쟁터로 나갈 아들의 대를 잇기 위해 부모가 며느리까지 데리고 면회를 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웅철씨가 편저한 『강병대-그리고 모슬포』(남제주문화원)에 수록된 사진이다.

이응준(1891~1985) 장군은 군의 원로 선배였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다니다 군대가 해산되자 관비유학생 신분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분이다. 해방 뒤 사실상 대한민국 육군 창군 주역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당시 은퇴를 눈앞에 둔 연령이었는데 육군대학 교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런 선배 군인에게 힘든 훈련소 운영을 맡기는 것이 무리일 수는 있었겠지만, 인품과 경력 면에서 탁월한 분이 여건이 좋지 않은 훈련소를 끌어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육군대학으로 이 장군을 찾아간 나는 “모슬포 훈련소장을 맡아 주시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습니다”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응준 장군은 선뜻 내 제안을 받아줬다. 그는 “늙은 몸이나마 나라를 위해 쓰이면 좋은 일이지”라며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나는 이응준 장군의 계급을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시키는 방안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올렸고, 이 장군은 제주도 모슬포 제1훈련소에 부임하면서 곧바로 진급했다.

 대규모 신병 양성소는 또 하나가 있었다. ‘연무대’라고 이름 붙여진 논산 제2훈련소였다. 제주도 모슬포 훈련소는 앞에서 소개한 대로 병력 수송에 여러 문제가 있는 곳이었다. 그에 비해 논산에 있던 2훈련소는 그런 문제가 없었다. 단지 나중에 생긴 곳이라서 신병 훈련체계가 모슬포 1훈련소에 비해 떨어졌다.

 그곳의 가장 큰 문제는 낙후한 시설이었다. 무엇보다 신병이 대규모로 들어가 훈련을 받아야 했지만 이들을 수용할 막사 시설이 형편없었다. 제주도 모슬포 훈련소 또한 텐트를 치고 신병들을 수용했지만, 논산 훈련소는 그보다도 사정이 좋지 않았다.

2차 대전 이후 널리 사용된 건축 자재 시멘트 블록.

 시멘트 블록이라는 게 당시의 한국에는 없었다. 시멘트로 벽돌처럼 생긴 블록을 대량으로 찍어 이른 시간 안에 건물을 올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요즘에야 흔하디 흔한 물건이지만, 당시의 대한민국 형편에는 그것을 찍을 기계와 기술이 모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우선 논산 훈련소의 상황을 미군들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미 군사고문단장을 불러 훈련소 운영도 운영이지만, 신병들이 텐트도 제대로 칠 수 없는 상황에서는 훈련 자체가 제대로 될 리 없을 것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미군은 바로 지원에 들어갔다. 그들이 실어 보내준 대량의 목재와 루핑, 시멘트 블록 등으로 신병 숙소를 만들어갔다.

 시멘트 블록은 전선의 보급을 책임지는 육군참모총장인 내 입장에서는 아주 탐이 나는 물건이었다. 미군은 주둔지로 정해진 곳에 대량으로 블록을 찍어 간단하게나마 튼튼한 막사를 세워 놓고 생활했다. 영구적인 숙소는 아니었지만, 비와 바람을 막고 멀리서 날아드는 적의 총탄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는 시멘트 블록 숙소 안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나는 선발대를 구성했다. 시멘트 블록을 찍는 기술을 배워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시멘트 블록은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미군이 찍어내고 있었다. 나는 공병대 장교 일부를 선발해 오키나와에 보냈다. 모래와 시멘트를 반죽해 구멍 뚫린 틀에 찍어내는 이 블록 제작 기술은 대단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기계 일부까지 받아 오도록 해 시멘트와 함께 모래를 섞어 블록을 찍어내게 되면서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논산 훈련소 막사 문제를 이 블록으로 해결했고, 급기야 이를 다른 건축 분야에도 널리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쓰임새가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또 하나 잊지 못할 일은 논산 훈련소에서 생겨난 ‘씨받이 면회’ 에피소드다. 당시에도 가족이 훈련병을 면회하는 일이 잦았다. 전선으로 떠난 아들을 만나보기 위해 부모와 조부모들이 이끄는 많은 가족이 훈련소에 몰려들었다.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절에도 군대 면회가 빈번하지만, 당시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전시 상황에서야 전선으로 보낸 아들의 안위(安危)가 오죽 궁금했을까.

 그때는 독특한 풍경이 훈련소 주변에서 벌어지곤 했다. 혹시 아들이 전선으로 나아갔다 죽어 돌아오는 것을 그대로 볼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자손을 귀하게 여기는 당시의 사회풍조에서는 군대에 간 아들이 주검으로 되돌아오기 전에 미리 후손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가족들의 일부는 아들의 뒤를 잇기 위해 부모들이 그 며느리까지 데리고 면회를 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훈련소에서도 그런 사정을 뻔히 짐작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애를 태우는 그런 일을 냉정하게 내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신병과 가족이 잠깐 면회하는 것이 규정이었지만, 훈련소 측에서는 며느리까지 데리고 면회를 온 가족에게 ‘특별 시간’을 허용해줬다. 아들과 며느리가 잠깐 동안이나마 후대(後代)를 만들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그렇게 전화(戰火)가 휩쓰는 대한민국 땅에서는 왕성한 생명력이 다시 번지고 있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우습기도 하겠지만, 열심히 후손을 만들어 이 땅의 명맥을 이어가는 한반도 사람들의 끈질김이 결국 오늘의 대한민국 토대를 형성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었던 조선에서도 일본 왜군의 엄청난 공격력을 끝까지 이겨낸 것은 이 땅을 딛고 끈질기게 살아온 민초(民草)들의 생명력이다. 외세의 침입을 받아 깨지고 또 깨지면서도 결국은 “맞서 싸워야 한다”는 호소 한마디에 들불처럼 일어나 적과 싸우는 이 땅 사람들의 생명력 말이다.

몸소 왜란을 겪고 후세를 위해 기록을 남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의 『징비록(懲毖錄)』에도 왜란 뒤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의병(義兵)과 끊임없이 전선에 나선 무명의 병졸(兵卒) 이야기들이 나온다.

 가진 것 없고, 채운 것 없는 상황에서 닥친 6·25전쟁이었다. 우리에게는 번듯한 M1 소총과 탱크, 야포가 없었다. 병사들을 재울 텐트도 부족했고, 임시로 그들을 편안하게 잠재울 시멘트 블록의 숙소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싸워야 했다. 적에 맞서 싸우기 위한 우리들의 몸부림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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