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소반, 군더더기 빼고 쓰임새 더하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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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소반(小盤). 얼마 전만 해도 여느 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생활용품이었다. 주로 음식을 차려 나르고 받치는 데 쓰였다. 집 안이나 야외나 어느 자리에 놓여도 소박하면서도 조화로웠다. 하지만 라이프 스타일이 서구식으로 바뀌면서 소반은 하나 둘씩 사라졌다.

 동양문화디자인연구소(소장 최경란)에서 소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국내외 건축가·디자이너 10인과 함께 소반의 ‘미(美)’를 현대적으로 다시 빚어내고 있다. 독일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드, 일본 디자이너 구로카와 마사유키, 이집트 출신의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도 참여했다. 한국에서는 건축가 승효상(이로재 대표)과 장윤규(운생동 대표)가 함께 했다. 아트 퍼니처 디자이너로 유명한 최병훈과 하지훈도 가세했다. 그 결과물을 모아 다음 달 한글과 영문으로 함께 쓴 책자 『소반』을 낼 예정이다. 각기 다른 캐릭터로 재탄생한 소반을 통해 한국적 감수성의 세계화를 가늠해본다.

전통은 ‘정신’에 있다

1 이집트 출신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의 다용도 소반. 2 간결한 선과 면을 강조한 건축가 승효상의 소반. 3 최병훈 작품. 소반 이라는 이름의 조각품에 가깝다. 4 일본 디자이너 구로카와 마사유키의 작품. 둥그런 나무 상판과 가느다란 금속 재질의 다리가 대비와 조화를 이룬다. 5 건축가 장윤규의 작품. 과감한 디자인의 건축물 축소판 같다. [동양문화디자인연구소 제공]

가구 디자이너 최병훈 교수(홍익대)의 소반은 ‘부드러운 알’을 살짝 베어놓은 것 같은 형상이다. 소반의 쓰임새를 보다 폭넓게 해석했다. 실내에 조형을 만들어내는 ‘오브제’ 역할까지 보탠 것이다. 그는 “소반의 기본적인 기능을 넘어 쓰는 사람이 작품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부드러운 곡선을 주로 이용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형태를 추구하는 것은 최 교수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는 소반에 명상적 요소를 보탰다. “모든 작품이 자기를 나타내고 표현하려고 요란스럽게 아우성을 치고 있다. 현대인은 지쳐가고 있다. 단순한 형상으로 고요함에 이르는 순간을 머리에 그렸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소반의 특징을 패턴이나 재료보다 정신에서 찾았다. 절제된 조형으로 내면에 울림을 만들어내는 점에 주목했다. 전통의 미를 단청 같은 외형에서만 찾기보다는 옛 정신을 소화해 시대의 정신을 담아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디자인도 예술적인 요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디자인에 생명력을 주는 게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

 젊은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씨는 소반의 본래 디자인에 최대한 충실한 작품을 선보였다. 소반이 지닌 멋스러움을 살리되 현대 생활문화를 반영해 다리를 높인 소반이다. 공간에서도 여백을 살리는 것으로 유명한 건축가 승효상씨는 가구 디자인에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빈자의 미학’을 그대로 담았다.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최대한 간결한 선과 면을 썼다. 자칫 차가울 듯하지만 나무 재료를 사용해 따뜻함을 더했다.

강한 캐릭터를 담다

장윤규씨의 소반은 파격적이다. 상판과 다리의 구분이 없다. 장씨는 서울 대치동에 자리한 금호주택문화관 ‘크링(Kring)’을 설계한 바 있다. 소리가 꽝꽝 울릴 듯한 ‘스피커 모양’의 건물을 조각품처럼 지은 대담함은 소반 디자인에서도 드러나 있다. 그는 “흔히 소반이라고 하면 짐승 다리의 형태, 각이나 원으로 표현되는 상판을 떠올리지만 내가 초점을 맞춘 것은 패턴과 기능”이라고 말했다. 전통적인 창호처럼 반복되는 패턴 그 자체가 구조가 되고 기능이 되는 점에 주목했다는 설명이다. 이번 작업은 장씨에게 특별한 자극이 됐다. 그는 “건축과 가구는 스케일만 다를 뿐 디자인 측면에선 동일하다. 다양한 전통가구를 재해석하며 가구 디자인 실험을 계속하고 싶다. 요즘 전통가구를 수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 9월 서울디자인한마당의 파빌리온을 설계한 다니엘 리베스킨드는 한복에 나타난 둥글려진 부분과 버선코 끝을 닮은 경쾌한 곡선에서 힌트를 얻었다. 경쾌하지만 날카롭지 않고, 리듬감과 조화로움이 두드러진다. 이집트 출신의 세계적 산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는 이리저리 들고 다닐 수 있는 소반의 유동성을 ‘다목적용’ 테이블로 풀이했으며, 구로카와 마사유키는 소반을 일상의 친구 같은 ‘작은 고양이’와 같은 존재로 해석한 작품을 내놓았다.

“디자인은 새로운 가치를 찾는 작업”

최경란 동양문화디자인연구소장은 “이번 작업이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전통적인 아이템이 가진 잠재적인 가치, 즉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번 ‘소반’ 프로젝트의 일부 작품은 서울디자인한마당에서 소개돼 큰 호응을 받았다. 최 소장은 “시작은 이제부터다. 앞으로 다양한 아이템을 갖고 한국의 미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최병훈 교수는 “세계에서도 통하는 디자인을 위해서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언어로 대화하려는 자세가 먼저다. 전통을 재해석하고 아트와 결합하는 것은 디자인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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