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4. 마스카라 만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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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30대 초반의 필자. 그 때까지도 나는 유랑극단을 좇아다니는 무명 배우에 불과했다.

무작정 유랑극단을 따라나선 때는 1946년 2월이었다. 어둠이 내렸다. 트럭 짐 칸으로 칼바람이 몰아쳤다. 고린내가 진동하는 담요를 둘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겨울밤의 삭풍은 뼈 속까지 파고 들었다. 그래도 덜커덩 덜커덩, 트럭은 달렸다. 하루 밤낮을 꼬박 달려 서울역에 도착했다. 짐 칸에 탄 사람들은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두 눈만 말똥말똥했다.

먼지를 털 틈도 없었다. 선배 단원들은 욕설부터 쏟아놓았다. "야! 신참이 도대체 뭐하는 거야? 밥 값이라도 해." 끙끙거리며 트럭에 있던 무대 장치를 서울역 소화물계로 옮겼다. 짐에 붙은 꼬리표를 보니 행선지는 수원이었다. 수원. 이유 없이 가슴이 뛰었다.

역전 간이식당에서 국수로 배를 채웠다. 그리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제 멋대로였다. 마음이 내킬 때만 달렸다. 아무 역에서나 한 시간, 두 시간 마냥 서있기도 했다. 승무원들은 해명도 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수원까지는 백리 길. 그런데 저녁 여섯 시에 출발한 기차는 새벽 네 시에야 수원역에 닿았다. 광복 후 모든 게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수원역으로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런데 복장이 이상했다. 국민복 차림에 글자 없는 빨간 완장을 차고 있었다. 틀림없는 좌익이었다. 단장은 "우리 민협의 수원 공연을 산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들을 따라 여관으로 들어갔다. 선배들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나도 구석에 가서 누웠다.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얼마 후 나는 "아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누가 내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기 때문이다. 눈을 떠보니 선배 단원이었다. 또 다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새까만 녀석이 무슨 잠이야? 당장 일어나."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너 말이야, 부엌에 가서 솥 그을음 좀 긁어와." 영문도 모른 채 부엌으로 갔다. 당시만 해도 솥은 무쇠였고, 연료는 장작이었다.

나는 숟가락을 찾아서 솥 밑을 긁었다. 온 몸에 시커멓게 그을음이 묻었다.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지 궁금했다. 사기 대접에 반 정도 그을음이 찼다. 밖으로 나갔더니 선배가 화덕에 불을 때고 있었다. 그을음 대접을 내밀자 뭔가와 알뜰하게 섞었다.

"지금 뭘 만드는지 알아?" 잠자코 있었다. "이게 바로 마스카라야." 나는 깜짝 놀랐다. 바셀린에다 숯검정을 넣고 끓이면 바로 마스카라였다. 또 아연화 전분과 바셀린을 섞고 주황색 안료를 넣어 끓이면 파운데이션이 됐다. 화장을 지울 때는 값비싼 콜드 크림 대신 돼지비계에서 걸러낸 기름을 사용했다. 모두가 분장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난생 처음 마스카라를 만들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배우 얼굴을 그리는 화장품을 내 손으로 만들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가느다란 전율이 올라왔다. '이렇게 한 발짝씩 배우가 되는구나.' 앞으로 겪을 무지막지한 고생길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배우'란 두 글자가 내 심장을 흔들고 있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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