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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만 남은 제국의 흔적, 개화기엔 신문화의 통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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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호 19면

고층 건물 숲에 둘러싸인 환구단 주변에도 가을색이 짙게 물들고 있다. Y자 형태의 조선호텔과 황궁우 팔각지붕의 곡선이 잘 어울린다. 신동연 기자

서울광장 남동쪽에는 호텔이 많다. 행정과 경제·문화시설이 집중된 시내 중심가라서 업무와 쇼핑은 물론 관광하기가 좋다. 빌딩 숲 사이로 경복궁과 북한산이 조망되기도 해서 운치 있다. 이곳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호텔은 대한민국 호텔의 대명사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로 공식명칭이 바뀌었지만 설립 당시부터 오랫동안 불려왔던 조선호텔로 통용된다. 한국 최초와 최고 기록들을 만들어내며 어언 100년의 세월을 더듬어온 조선호텔은 근대와 현대사의 중심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은 단순한 숙박과 사교모임 장소가 아니었다. 정치와 경제의 중심축이었고 문화의 발신자였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49>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3면으로 된 Y자 형태의 건물부터가 이채롭다. 이 삼각형 공간 형식에는 특유의 장소성과 역사성이 깃들어 있다. 오래된 도시에는 역사를 계승해온 사람들의 정신이 녹아있기 마련이다. 공간형식으로 남은 현장에서 시간여행을 떠나다 보면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과 생활상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조선호텔 옆에는 고풍스러운 3층 팔각지붕 건물이 서 있다. 고종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571C>丘壇)의 부속건물 황궁우(皇穹宇)다. 얼핏 보면 호텔에 딸린 후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적 157호 문화재로 호텔 소유가 아니다. 1899년에 축조하고 태조 이성계의 신위(神位)를 모셨던 곳인데 주변이 온통 고층빌딩 숲속이라서 차라리 주저앉아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환구단은 남쪽 지금의 호텔 자리에 있었다. 바투 조여든 건물들 때문에 하늘이 비좁아 보이는 이곳에서 신성한 기운 같은 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황제에 오른 곳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서울은 정말 깊다. 깊어도 너무 깊다. 황궁우는 서울광장 쪽이나 을지로 입구 쪽에서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600년 전통도시 서울은 본래 계획도시였다. 처음부터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꾀해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았다. 대도시의 경제적 정글로 변한 오늘날, 가까스로 남아있는 옹색한 전통양식의 공간에서 미학적 관조를 논하는 건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1897년 10월 12일 새벽,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자리라는 사실도 그리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군사력과 외교력 등 국력이 밑받침되지 않은 제국 선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1913년 일제는 화강암 기단으로 된 환구단을 헐고 이듬해 서양식 5층 건물(지상 4층, 지하 1층) ‘조센호테루(朝鮮ホテル)’를 세운다. 설계자는 경복궁 정면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설계했던 독일 건축가 게오르크다. 조선왕조의 상징적 공간에 세운 조선호텔은 총독부 산하 철도호텔 가운데 하나다. 남대문역과 가까운 이곳 소공동(小公洞), 곧 작은 공주골은 태종의 둘째 딸 경정(慶貞) 공주의 저택이 있어서 유래된 남촌의 한 마을 이름이다. 일본인들의 상권이 새롭게 형성되면서 부상한 남촌에는 동양척식회사,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조선식산은행, 미쓰코시백화점이 차례로 들어서서 행정과 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조선호텔은 개관 당시부터 장안의 화젯거리로 등장했다. 사교댄스, 수직열차(엘리베이터), 프렌치 레스토랑, 아이스크림, 서구식 결혼식 등 생소한 서양문화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하지만 인근 초가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던 조선인들에게는 들어갈 수 없는 별천지였다. 그것은 보통의 일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38년 일본인 실업가 노구치가 조선호텔이 바로 보이는 지점에 지상 8층 지하 1층의 반도호텔(롯데호텔 자리)을 세운 까닭이 조선호텔에서 문전박대당한 수모를 씻기 위함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한국 근대소설에 등장하는 조선호텔은 조선의 처절한 실상과 너무도 이질적이다. 1941년 발간된 이효석의 『벽공무한』에는 러시아 댄서 ‘나아자’와 조선인 문화사업가 ‘일마’가 하얼빈에서 기차를 타고 경성에 도착, 조선호텔에 여장을 푼다. 둘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나아자’는 호텔의 호화로운 치장에 놀라고 창밖으로 보이는 황궁우의 아름다움에 빠진다. 그러자 ‘일마’는 옛날 사람들이 세운 낡은 집이라며 추한 현실을 일깨워준다.

“팔각당 넘엔 개천이 있구. 그 넘에 빈민굴이 있다우. 빈민굴 없는 데가 없겠지만 조선은 전체가 커다란 빈민굴이라우.”

조선호텔처럼 조선왕조의 유산이 남아있는 곳에 건설된 건축물은 조선인들에게 식민지의 현실을 일깨워주는 장소였던 것이다.(『‘조선호텔’-제국의 이상과 식민지 조선의 표상』·정영효)
1945년 일제 해방 후 이 호텔을 거처로 삼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식 명칭인 ‘조센호테루’를 조선호텔로 바꿔 부르게 한다. 50년 한국전쟁 때는 북한 인민군이 호텔을 점령해 사용했으며 53년 1월부터 미 8군 숙소로 쓰였다. 그 무렵에 밥 호프와 메를린 먼로 등 미국의 유명 연예인들이 방문해 위문공연을 하기도 했다. 맥아더 장군, 포드 전 미국 대통령도 다녀갔다. 그러다 61년 미군으로부터 양도받아 몇 달간 총리공관으로 쓰다가 교통부가 관광호텔로 관리하게 된다.

임페리얼 슈트라고 불렸던 201호실은 왕족에게만 제공되던 특실이었다. 일본과 유럽의 왕족들이 묵어갔고 이승만 대통령, 김구 선생, 서재필 박사가 머물렀었다. 63년 당시 박정희 장군이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곳도 이 방이다.

지금의 Y자형 건물은 황궁우 조망을 고려해 70년에 재건축했다. 그때 옛 조선호텔 건물을 헐어버렸기 때문에 역사적인 순간들을 간직한 현장 201호실이 보존되지 못했다.
79년 세계적인 호텔 체인 웨스틴 인터내셔널호텔과의 합자로 호텔 명칭이 현재의 웨스틴조선호
텔로 개칭됐다. 95년 ㈜신세계가 주식을 모두 인수, 지금까지 국내 자본으로 운영되고 있다.

1층 나인스 게이트 그릴 안쪽엔 서재필룸
우리나라 호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조선호텔은 100대 호텔에도 자주 오른다. 공항에서부터 호텔 직원의 에스코트를 받아 객실에서 사인만 하면 체크인이 되는 ‘익스프레스 체크인 서비스’는 외국인들이 즐겨 이용한다고 한다. 제물포 개항장 특집(본보 제155호)에서 다뤘던 것처럼 1888년 인천에 세워진 대불호텔이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호텔이다. 서울 정동에 있었던 손탁호텔도 1902년에 문을 열어 양탕국이라고 불린 커피를 판다. 하지만 그 호텔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96년 10월, 조선호텔은 한국 최초 호텔로 기네스북의 인증을 받는다. 정문 왼쪽 벽에 동판이 박혀 있다.

1층 나인스 게이트 그릴 안쪽에는 서재필룸이 있다. 1년여 동안 조선호텔에 묵으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서재필 박사를 기리는 뜻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벽면에 박사의 사진과 독립신문 등을 전시해 놓았다. 소규모 모임(16명) 장소로 적격이다.

나인스 게이트 그릴은 대한제국의 유산 황궁우를 후원처럼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 풍광이 빼어나다. 바람 불거나 비, 혹은 눈이 내리는 날 이 그릴에 앉아서 창밖을 보면 거기 공간형식으로 남은 옛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가만히 말을 건넨다. 밀려드는 강한 제국에 맞서 이름뿐인 제국을 표방했던 조선의 지배층은 단을 쌓고 하늘에 기원했다. 그들은 끝까지 하늘모심을 버릴 수 없었다. 당시 강한 제국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고 그 터를 밀어낸 다음, 대륙으로 팽창해가는 교두보로 제국의 호텔을 세웠다. 일본은 내국인 관광단을 모집해 만주까지 이어진 철도여행을 권장했고 조선호텔은 중간 경유지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넌지시 황궁우를 바라보며 ‘조선의 미(美)’를 즐겼을 터다. 오래 기억되고 여러 사람들이 예찬하는 인간의 창작물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건 간에 미적 요소를 지닌다. 찬란한 정신이 스러지고 박제된 건물로 남은 황궁우를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걸 탓할 수 있으랴.

“한국은 기적의 나라입니다. 100년 전의 국치, 한국전쟁,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그때마다 강인하게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조선호텔의 터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잘 압니다. 일본인들이 세운 작은 호텔에서 세계적인 호텔로 거듭났지요. 한국 젊은이들에게 권합니다. 혼자서 세계로 나가 마음껏 누벼보라고요. 특히 호텔리어들에게는 한국에서 안주하지 말고 세계의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라고 하지요. 여기서 마을은 호텔입니다. 호텔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마을이니까요. 주방에서도 일해 보고 다양한 체험을 하다 보면 경영마인드가 생깁니다.”

20층 라운지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출신 총지배인 게하드 슈미트(사진)는 외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려면 무엇보다도 섬세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재 환구단과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결연 때문일까. 호텔 측은 문화재 관련 봉사활동을 많이 한다고 한다. 지난 8월에는 17층에 ‘한국’이라는 콘셉트로 디자인된 새로운 스위트 룸 3개를 오픈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심정주·최시영·엄주언 등 3인은 ‘온돌’ ‘툇마루’ ‘디딤돌’ ‘성곽’ 등 한국 전통 건축물에서 찾은 디자인 요소를 현대적으로 형상화해 호텔 객실에 반영했다.

백화점이 그랬던 것처럼 호텔문화는 일본에 의해 근대의 표상으로 이식되었다. 이제 국가가 나서서 문화를 전파하는 시대가 아니다. 또한 신분 제약 없이 누구라도 그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 슈미트의 말처럼 세계로 열린 독립된 마을이 호텔이다. 그러나 그 세련되고 품격 높은 마을의 촌장이나 주민이 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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