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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Insight] “시슬리의 경쟁 회사는 애플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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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귀족이 만든 귀족의 화장품’.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인 시슬리(sisley)를 일컫는 말이다. 최근 출시된 ‘시슬리아 글로벌 퍼밍 세럼’의 가격은 30mL에 45만원. 하지만 ‘중력에 대항해 피부 탄력을 높여준다’고 홍보한 이 화장품은 대박 리스트에 올랐다. 시슬리 제품을 만드는 건 육군 원수(Field Marshal)를 셋이나 배출한 프랑스의 귀족 집안이다. 영화배우 카트린 드뇌브, 소피아 로렌 등이 단골 고객이다. 고(故) 다이애나비도 이 제품을 즐겨 썼다. 귀족 출신이 경쟁이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어떻게 우뚝 섰을까. 지난달 한국을 찾은 필립 도르나노(46) 사장을 만나 ‘귀족 화장품’을 만든 ‘귀족 경영’에 대해 들었다. 그는 뜻밖에도 경쟁사가 애플이라고 했다. 창의성 면에서 라이벌이라는 얘기였다.

글=김진경 기자
사진=김도훈 인턴 기자

●성공한 사업가와 귀족은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화장품 사업을 처음 시작한 건 할아버지 기욤 도르나노다. 할아버지는 ‘코티 분’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향수왕’ 코티와 인연이 깊다. 코티가 소유했던 신문사(르 피가로)에서 매니저 일을 했고, 코티가 사망한 뒤 르 피가로 오너 자리를 이어받기도 했다. 코티 곁에서 그의 화장품 사업을 쭉 지켜봤던 할아버지는 1930년대 랑콤을 공동 창업했다. 50년대 이후 랑콤에서는 손을 뗐지만, 아버지 위베르 도르나노가 1952년 올랑을 설립해 사실상 화장품 사업을 이어받았다. 아버지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76년 시슬리를 만들었다.”

●시슬리 탄생에 어머니 이자벨의 역할도 컸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폴란드 왕족 출신이다. 할아버지가 바르샤바 대사였을 때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인 할머니를 만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버지 역시 폴란드 공주인 어머니와 결혼했다. 어머니는 외교관이던 외할아버지를 따라 유럽 각국을 돌아다닐 기회가 많았다. 각 나라의 다양한 자연환경을 경험하면서 안목을 길렀고 ‘가격에 구애 받지 않고 최고의 화장품을 만들자’는 원칙을 세우게 됐다. 시슬리는 어머니가 식물학자들과 7년 동안 공동연구를 한 끝에 나온 작품이다.”

●대대로 귀족 집안인데 어떤 영향을 받았나.

 “우리 집안이 배출한 육군 원수만 세 명이다. 알폰소 도르나노, 장 바티스트 도르나노, 필립 앙투안 도르나노가 그들이다. 필립 앙투안은 나폴레옹의 사촌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파리 앵발리드에 있는 군사박물관을 후원하고 있다. 선조에게 물려받은 소장품도 전시한다. 자연히 어릴 때부터 역사·정치·예술 등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문학을 사랑한다.”

●어떤 작품을 좋아하나.

 “올여름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로런스 더럴의 『알렉산드리아 4중주』와 황석영의 『심청』이다. 다양한 장르의 책을 1년에 50권 정도 읽는다. 배우이자 패션 디자이너인 아내와 함께 연극 대본을 쓰기도 한다. 그중 두 작품은 실제로 공연도 됐다.”

●짧은 기간에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비결은 무엇인가.

  “시슬리는 다른 브랜드에 비해 광고를 많이 하지 않는다. 대신 적극적으로 고객에게 샘플을 써보게 한다. 화장품 특성상 눈으로 보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직접 써 보는 게 중요하다. 특히 시슬리 제품은 고가라서 품질을 모르는 상태에서 선뜻 구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단 조금이라도 써 보면 품질이 좋다는 걸 느낄 수 있고, 그게 구매로 이어질 것으로 봤다. 한 번이라도 시슬리 매장에 들러 고객카드를 작성한 고객에게는 무조건 샘플을 보낸다.”

●전체 매출은 얼마인가. 한국 시장의 비중이 높은 편인데.

 “매출은 원래 공개하지 않는데 특별히 밝히겠다. 4억5000만 유로(약 6860억원)다. 그중 프랑스를 뺀 나머지 매출액 중 상당 부분이 한국에서 발생한다.”

●시슬리가 한국에서 유독 잘 팔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고객은 훌륭한 미적 감각이 있다. 전 세계에서 인구 대비 화장품 수요가 가장 많은 시장이 한국이다. 미국 등 다른 나라에 가서도 한국의 트렌드에 대해 소개할 정도다. 그런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품질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가격에 구애 받지 않고 최고의 품질에 집중한다. ‘비싸지만 좋다’는 반응이 나왔고, 그게 성공의 원인이었다.”

●시슬리는 ‘명품(luxurious product)’이다. 하지만 독보적이진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아닌, 고급 품질에 집중한다. 그래서 럭셔리보다 하이엔드(high end·동일 제품군 중 기능이 가장 뛰어난 제품을 가리키는 말)라는 표현을 썼으면 한다. 나는 매주 400여 개 보고서를 읽는다. 대부분 우리의 자체 리서치 자료다.”

●경쟁사는 어디인가.

 “애플이다. 경쟁 상품은 화장품이 아니라 아이팟이다. 창의적이고 제품의 질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카테고리의 제품도 지향하는 바가 같다면 경쟁 상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화장품 회사 제품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

도르나노 사장은 파리정치학교(Institut d’Etudes Politiques de Paris)에서 법학·정치학·경제학을 전공했다. 원래 화장품 사업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그의 꿈은 언론인이었다. 하지만 중대한 사건이 그의 인생 행로를 바꿨다.

●기자에서 화장품 사업으로 진로를 바꾼 계기는.

“18세 때 뉴욕타임스 산하 회사에서 인턴을 했다. 그 회사의 사장이자 IHT(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파리 지사의 이사이던 분이 내게 미국에서 (기자로) 일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고민하고 있을 때 동생 마크가 자동차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동생의 죽음 때문에 가족 사업인 시슬리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가족 모두에게 충격이었겠다.

 “마크는 공부보다 시슬리 사업에 관심이 더 많았다. 당시 영업사원으로 매주 1500㎞씩 운전하고 다녔다. 사고도 고객을 만나러 가던 길에 일어났다. 그 일이 있은 뒤 가족들이 내게 ‘미국으로 가지 말고 같이 프랑스에서 일하자’고 했다. 나도 가족 곁에 있고 싶었다. 어머니는 마크의 죽음을 계기로 인시아드(INSEAD·1959년 프랑스 파리에 설립된 경영대학원)에 ‘시슬리-마크(Sisley-Marc) 장학금’을 설립했다.”

●시슬리에 바로 합류했나.

 “대학에 다니던 19세 때 합류했다. 용돈을 벌기 위해 매주 목요일 회사에 나가 전화 받고 우편물 확인하는 일을 했다. 그 많은 편지를 꼼꼼히 보다 보니 나를 감독하던 매니저가 아버지에게 ‘필립이 우편물 확인하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쓴다’며 불평을 하기도 했다(웃음). 1986년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그의 부모인 위베르·이자벨 도르나노 부부는 2남3녀를 뒀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들 마크 외에 자녀는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시슬리 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다른 가족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누나 엘리자베스는 스페인의 고위 금융인과 결혼해 마드리드에 살고 있다. 예전에 시슬리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금은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아동을 돕는 재단에서 일한다. 동생 레티시아는 환경에 관심이 많아 시슬리 재단의 환경보호 프로젝트에도 관여하고 있다. 막내동생 크리스틴은 미국 프린스턴대를 졸업하고 패션 쇼핑몰인 삭스 피프스 애비뉴(Saks Fifth Avenue)에서 2년 동안 경험을 쌓은 뒤 시슬리에 합류했다. 지금은 영국 지사장을 맡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어머니 이자벨, 막내동생 크리스틴, 필립, 아버지 위베르.

●가족기업인데.

 “의사결정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게 가족기업의 가장 큰 장점이다. ‘내 사업’이라는 책임감이 더 강하다는 것, 장기적인 연구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되다 보면 조직이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약점도 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서로 깊이 신뢰하고 유대감이 강해 그런 문제가 없다. 조직화만 잘된다면 가족기업은 가장 이상적인 비즈니스 단위다. 이런 점에서 가족기업은 정말 효율적이거나 아니면 아예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다.”

●당신에게 가족의 의미는.

 “친한 친구끼리 이런 농담을 한다. ‘도르나노 가족은 초대하지 마. 한 명을 초대하면 가족 전체가 다 몰려온다니까’(웃음). 모두 바쁘지만 주말만 되면 마드리드에 있는 누나부터 미국 브라운대에 다니는 조카까지 20여 명이 다 모인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가족이다.”

식물성 원료 바탕, 자연주의 표방 … 시슬리의 성공 비결

인삼은 한국산 … 제품 하나 내놓는 데 10년 연구

1976년 설립된 시슬리가 짧은 기간 동안 정상의 자리로 도약한 발판은 바로 자연주의를 표방한 품질에 있다. 필립 도르나노 사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시슬리를 특별하게 만든 건 자연 추출물을 만들어 사용하는 과학적 방식이다. 아버지 위베르는 1970년대 중반부터 화장품에 식물을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해 왔다. 화장품계의 살아 있는 창조자(creator)라고 할 수 있다. 시슬리는 제품의 한 라인에 대한 연구를 10년 이상 한다.”

실제로 시슬리의 노화방지(안티에이징) 라인인 ‘시슬리아’는 제품 개발부터 출시되기까지 10년 이상 걸렸다. 대부분 연구에 걸린 시간이다. 시슬리는 15가지 식물성 활성 성분이 든 화장품을 캡슐에 담는 데 성공했다.

시슬리는 품질을 과도하다고 할 정도로 중시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비용이 얼마나 들든 관계없이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는 이자벨 도르나노(필립 도르나노 사장의 어머니)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위베르 도르나노 부부는 일주일 중 하루를 연구소에서 보낸다. 제품력의 기본이 되는 건 원료다. 시슬리는 50여 종의 식물을 주원료로 쓴다. 식물의 종류뿐 아니라 재배지, 수확 시기, 추출법도 엄밀히 따진다. 예를 들어 인삼은 한국산과 중국산을, 센텔라 아시아티카는 아프리카산을 쓴다. 타임(백리향)과 같은 식물의 경우 1년에 단 하루 정해진 날짜에 수확을 한다. 성분을 추출할 때도 알코올 등 유기용매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 증류법을 이용한다.

이처럼 엄격한 품질을 뒷받침해 주는 게 연구 시설이다. 프랑스 블루아에 있는 시슬리 생산공장은 기술력의 집합소다. 품질관리를 위해 모든 스킨케어 제품을 이곳에서 생산한다. 모든 제품이 유럽·미주 지역에서 요구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열린 토론’도 시슬리의 창의성을 높이는 핵심요소다. 필립 도르나노 사장은 매주 수요일을 ‘테크니컬 미팅’의 날로 정했다. 이날엔 마케팅 담당자와 연구원이 함께 자리한다. 고객이 원하는 제품에 대해 마케팅 담당자가 설명하면, 연구원이 그에 필요한 기술에 대해 의견을 제시한다. 이 미팅이 가능해지려면 마케팅 담당자도 기본적인 기술적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필립 도르나노 사장은 “서로 충분히 의견을 주고받은 뒤 제품 개발을 시작한다”며 “열린 연구 방식을 통해 훌륭한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말했다.

특히 시슬리가 한국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던 배경으론 고가 마케팅과 구전 마케팅이 꼽힌다. 좋은 제품도 팔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 점에서 유통업체 관계자들은 “시슬리는 고가 마케팅을 적절히 잘 활용한 사례”라고 입을 모은다. 현대백화점의 한 화장품 바이어는 “‘선택받은 상류층의 화장품’이라는 이미지를 잘 구축한 게 시슬리의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가격대별로 다양한 라인을 보유하고 있는 랑콤·디올·에스티 로더 등과 달리, 오히려 고가 라인에만 치중해 충성 고객을 확보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식물 성분을 강조한 것도 주효했다. 시슬리는 ‘천연 식물 화장품’이라는 점을 꾸준히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워 왔다. ‘당장 극적인 효과가 나타나진 않더라도 자극이나 트러블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얻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또 다른 바이어는 “1980년대 후반 시슬리가 국내에 처음 선보였을 때만 해도 ‘식물성 화장품’이라는 게 생소했다”며 “고객 입장에선 비싸더라도 방부제나 화학 성분이 최소화된 화장품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8년 각국이 외환위기에 빠졌을 때도 시슬리는 오히려 ‘샘플링 마케팅’을 강화했다. 모든 회원에게 더 많은 샘플을 보냈다. 샘플을 써본 고객이 주변 사람에게 추천하면서 고객 수는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j 칵테일 >> ‘피란 시절 그 꽃향기 맡고 싶구나’ 어머니 위한 향수, 오 뒤 스와르

시슬리의 향수 제품 중 베스트셀러인 ‘오 뒤 스와르’는 원래 필립 도르나노 사장의 어머니인 이자벨 도르나노가 쓰던 개인 향수를 상품화한 것이다.

폴란드 공주 출신인 이자벨의 가족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페인에 피란을 가 있었다. 왕자이자 외교관이던 이자벨의 아버지가 전쟁 중 러시아군에 붙잡혔기 때문이다. 그는 친분이 있던 이탈리아 총리의 도움을 받아 겨우 빠져나온 뒤 가족이 미리 가 있던 스페인 세비야로 피신했다. 이자벨의 가족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세비야에서 수년 동안 생활했다. 이자벨은 나중에 폴란드로 돌아간 뒤에도 스페인에서의 어린 시절을 잊을 수 없었다. 특히 저녁마다 산책을 하며 맡았던 꽃향기가 인상적이었다. 밤에만 피는 ‘스랭가’라는 꽃이었다. 이자벨은 위베르와 결혼한 뒤에도 입버릇처럼 “스랭가 향기를 다시 한번 맡아봤으면” 하고 말했다고 한다.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던 위베르는 시슬리 연구진과 향수 개발에 들어갔다. 몇 년 동안의 연구를 거친 끝에 마침내 스랭가 향기를 기초로 한 향수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주된 향인 스랭가뿐 아니라 일랑일랑, 재스민, 장미, 백합 등의 향기를 첨가해 꽃이 만발한 스페인 정원의 풍경을 그대로 되살릴 수 있었다. 위베르는 이 향수에 ‘밤의 향수(오 뒤 스와르)’라는 이름을 붙여 결혼기념일에 이자벨에게 선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향수는 오직 이자벨만의 것이었다. 대량 생산을 하지 않고 이자벨이 쓸 만큼만 만들었다. 향수가 널리 알려지게 된 건 그로부터 5년 뒤다. 이자벨의 주변 사람이 그녀가 쓰는 향수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자 이 향수를 상품화하기로 한 것이다. 오 뒤 스와르는 1993년 스페인의 권위 있는 뷰티 어워드인 ‘텔바 어워드’에서 ‘최고의 향수’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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