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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평범하나 글이 아름다워 … 우리는 ‘속 멋’ 든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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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센터에 문학회가 있다구요? 스포츠댄스·요가는 인기가 높지만 글을 쓰고 발표하는 모임이 유지되기는 쉽지 않다. 2002년 천안 신안동주민자치센터에 설립된 ‘신안수필문학회’가 지난달 3번째 수필집을 냈다. 회원 25명은 매주 만날 때마다 이야기꽃을 활짝 피운다.

조한필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신안수필문학회 회원들은 매주 화요일 주민자치센터에서 만나면 금세 문학소녀·소년이 돼 이야기꽃을 피운다. 왼쪽부터 김용순 지도강사, 김상금, 이옥희, 금명숙, 한문자, 김진숙, 변옥름, 조규석, 장유순, 안기자, 방미현씨. [조영회 기자]


갑자기 화제가 ‘휴대전화 단축번호 1번이 어디냐’로 넘어갔다. “당연히 집 전화번호지.” “배우자 번호인 사람도 많을 걸?” “요샌 아이들 번호를 입력한 사람이 많다.” 의견이 분분했다. ‘신안수필문학회’ 주례모임이 열리고 있는 신부동의 신안동주민자치센터 강의실. 세상 대소사를 글감으로 하는 수필 장르에서 휴대전화는 재미있는 소재다. 송주완(47·신부동)씨가 “응급상황을 당하면 누군가 내 휴대전화의 1번을 눌러 연락할 곳을 찾으니 1번은 나를 보호해 줄 수 사람으로 해야 한다”고 하자 모두 수긍했다. 지난 2일 모임에 참석한 17명 중 송씨와 조규석(70·와촌동)씨를 빼곤 모두 여성이었다.

우리 문학회는 항상 행복하다

방미현(45·두정동)씨의 습작을 강평하는 자리인데 이야기가 자꾸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번엔 눈(雪). 지도강사인 김용순(53) 천안수필문학회장이 “눈 하면 뭐가 연상되냐”고 묻자 대답이 펑펑 쏟아졌다. “덮어준다” “깨끗하다” “차갑다” “기다림”. 김진숙(62·성거읍)씨가 “어떤 이는 수제비가 떨어지는 것같다고 하더라”고 하자 웃음이 터졌다. 방씨 작품 중 ‘알레르기 자녀가 있어 지금껏 에어컨 없이 지냈다’는 대목에선 “더운 여름에 부부 금슬은 어떻게 지켰지?” 짓궂은 질문이 나왔다. 그러자 누군가 “에어컨 켜자, 끄자로 매일 부부싸움하는 집보다야 낫지”로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우리 문학회는 행복하다. 쓰고 읽고, 특히 내 글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 행복하다”는 변옥름(71·두정동) 회장의 자랑이 가슴에 와 닿는다.

60, 70대가 여럿 있어 글을 볼 때 돋보기 필수.

 세 번째 수필집 『시들지 않는 꽃』에는 회원 25명 중 16명이 두세 작품씩 실었다. 추억속 일을 떠올리는 글이 많았다. 한문자(65·두정동)씨는 40여 년전 시집가던 날 내린 함박눈을 떠올렸다. “맞선보고 두 달도 안 돼 벼락치기로 결혼했어. 눈이 소담하게 내리는 데 어머니는 승용차의 열린 창을 통해 ‘시부모님 공경 잘 하고 잘 살아라’하며 눈시울을 붉히셨지.” 한씨는 자식·손주에게 자신이 살아온 옛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어 수필을 쓰게 됐다고 했다. 동갑내기 이옥희(쌍용동)씨는 여고시절 교지에 글을 올리던 문학소녀였다. 이젠 할머니가 됐지만 스쳐가는 삶을 놓치기 싫어 글을 쓴다.

 문학회 막내 김상금(34·신부동)씨가 “살면서 받은 내 상처를 치유하려고 글을 쓸 때도 있다”며 끼어든다. 이번 수필집의 ‘개와 고양이’는 남편(개)과 자신(고양이)에 얽힌 이야기다. “아이가 나(김씨)는 여유롭고 자유로워 고양이 같고, 남편은 나한테 충성을 다해 개 같대요. 또 개와 고양이처럼 잘 싸워서….”(웃음)

 문학회 창립이래 회원은 관내 신부동·안서동으로 제한되지 않고 시 전체로 개방했다. 변 회장은 “전국적으로 주민자치센터에서 조직된 문학회가 이렇게 활성화된 곳은 드물다”며 “회원 서로 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천안에 살다 아산·서울 등지로 이사했어도 여전히 나오는 회원이 5명이다.

멋있게 살고… 노을 빛처럼 살고…

11월 첫 모임이 있던 이 날, 신입회원 3명이 들어왔다. 우진숙(43)씨는 “멋있게 살고 싶다”며 “겉 멋만 아니라 속 멋 있는 사람이 되려 글 쓰려 한다”고 입회 동기를 밝혔다. 스포츠댄스 배우러 주민자치센터 왔다가 문학회로 돌아섰다는 나원숙(47)씨는 ”예쁜 것,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글로 표현해 보고 싶다”고 했다. 문학회는 2명의 지도강사를 두고 있다. 김 회장 외에 한국문협 천안지부장을 지낸 백남일씨가 문학회를 이끈다. 글쓰기에 대한 좋은 글도 소개해 주고 수필의 구성, 표현기법 등을 일러준다.

 공주대 식품가공학과 교수를 정년 퇴임한 조씨는 백석대 명예학생으로 손자뻘 학생들과 국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모든 이가 탄성을 지르는 단풍처럼 곱지는 못해도 훈장같은 노을빛을 지키려는 자세로 열심히 여생을 살고 있다.” 그는 이번 수필집에 작품 ‘노을빛이고저’를 실었다.

 이 문학회 ‘원조’ 멤버 8명 중 3명이 남아있다. 금명숙(50·신부동)·김순자(66·성황동)·이옥희씨. 금씨와 김씨는 2, 3년전 『수필과 비평』을 통해 등단했다. 금씨는 “8년 전 회원 모집 당시의 홍보 문구 ‘이제 자서전시대다. 자신의 글을 쓰자’는 내용에 끌려 지원했다”고 기억했다. 이번 수필집 제목은 김씨 작품 제목에서 따왔다. 밤새 자신의 손을 차갑게 해 자식의 고열을 가라앉힌 어머니를 떠올려 KBS‘TV동화’에 선정됐다.

 수필집엔 눈에 띄는 작품이 여럿 있다. 이화숙(58·안서동)씨의 ‘착하게 살았나 보지’. 복권 당첨으로 착각해 호들갑을 떨며 전화했더니 남편이 심드렁하게 내뱉은 말이란다.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일용할 양식보다 조금 후하게 사니 이미 복권은 탔는지도 모를 일”이라며 애교있게 끝을 맺는다. 간호사 출신으로 응급구조단에서 일하는 장유순(44·신부동)씨는 고속도로 옆에 핀 잡초를 보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글을 쓰면서 인생의 힘을 얻는다

중증 장애 딸을 가진 정진숙(58·당진 고대면)씨는 글에서 많은 힘을 얻는다고 털어놨다. 그는 “딸 아이가 굼벵이처럼 늦고 때로는 자갈밭을 많이 구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목적지를 향하다 보면 길가의 작은 들꽃에도 눈을 맞추며 자신의 길을 가는 여유를 갖겠지”라고 썼다. 자신은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이해하며 듣는 이순(耳順·60대)에 들어서고 싶다고 했다. 이들의 작품을 읽은 입회 한 달째인 안기자(49·신부동)씨가 내년 수필집엔 꼭 멋진 글을 올려 가족·친구에게 자랑하겠다고 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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