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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건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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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저는 CTO입니다. Chief Toast Officer, 제가 CTO 자리를 계속 하는 건 Toast(건배)를 잘 하기 때문이지요.” 몇 년 전 삼성전자 이윤우 부회장이 비즈니스 와인 강좌에서 건배(乾杯) 제창에 앞서 한 말이다. ‘최고경영기술자(Chief Technical Officer)’인 자신을 ‘최고 건배자’로 재치 있게 빗댄 것이다. 그만큼 건배가 중요하다는 강조였을 터다.

 건배는 서양에서 의심(疑心) 문화의 산물이다. 술을 나눠 따라 단숨에 마심으로써 독주(毒酒)가 아님을 확인하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진실의 상징이요, 제스처였던 거다. 오늘날은 기원(祈願)의 의미가 크다. 건강과 발전, 행운을 빈다. 그래서 건배는 일상에서 빠지지 않는다. 친구 모임에서부터 국가 정상 간 만찬에까지 자리 불문(不問)이다. 건배할 때 기원을 담는 말이 건배사다.

 건배사는 모임의 성격과 맥락에 맞아야 한다. 2008년 1월 한덕수 당시 총리가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관에서 열린 중소기업인 신년 인사회에서 건배사를 했다. 한마디로 ‘9988’이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중소기업이 대한민국 기업의 99%, 전체 고용의 88%를 차지한다는 뜻이며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자는 의미도 있다.” 중소기업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절묘한 건배사였다. 건배는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마시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찔하고 위험한 건배사도 있다.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학창시절 건배사가 그랬다. 1980년대 박사과정 학생인 메드베데프는 선배의 박사논문 통과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건배를 제안했다. “러시아의 사유재산권 부활을 위하여.” 동료 학생들과 교수들이 기겁했다. 사유재산 개념이 없던 당시 그의 건배사는 ‘반란’이나 마찬가지였던 탓이다. 다행히 참석자들이 묻어버려 무사히 넘어갔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건배사의 위험에 빠져 있다. 온갖 건배 구호가 난무하는 시류(時流)에 편승해 성희롱성 저질 건배사가 적잖다. 급기야 경만호 대한적십자사 부총재가 그제 건배사 설화(舌禍)로 자리를 잃었다. 여기자들 앞에서 버젓이 ‘오바마’(오빠, 바라만 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 같은 건배사를 했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곧 건배사의 계절이다. 송년회가 줄을 이을 터다. 분위기 띄우는 것도 좋지만 성희롱 구설수를 피하려면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건배사를 고를 일이다.

김남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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