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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09) 먹는 것부터 해결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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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급식 모습.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4개 구역 28개 동으로 구성됐다. 한 구역에는 포로 6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빨치산과 그 가족들도 일부 수용됐다. 백선엽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1952년 논산에 있던 또 다른 포로수용소를 시찰하다 포로들의 급식 수준이 국군보다 더 높은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한국전쟁 60주년 사진집』(경기문화재단 엮음) 제공]

2년 전의 북한군 남침이 몰고 온 피해는 너무도 컸다. 대한민국 대부분 지역의 도로와 교량이 파헤쳐지거나 무너졌고, 각급 학교를 비롯한 공공기관의 시설도 거의 다 심각하게 파손됐다. 모든 것을 다 일으켜 세워야 하는 참담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힘을 얻을 곳은 많지 않았다. 전쟁과 함께 이 땅 위에 올라선 세계 최강의 미군만이 당시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서는 기반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나는 그저 육군 최고지휘관에 불과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보다 훨씬 큰 범주에서 국가의 재생을 추진하는 사람이었다.

 분명히 말하건대, 당시 대한민국 재기에 힘을 보태줄 수 있는 존재는 미군뿐이었다. 나는 정치와는 무관했지만, 미군의 존재감 때문에 국군 역량의 증강과 함께 대한민국 재건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국민을 먹이고 살리는 일이야 대통령이 신경을 써야 하는 문제지만, 나로서는 군대를 먹이고 입히는 일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이었다. 전선에 투입되는 병력, 전선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군대, 후방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군인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이 급선무였다.

 전쟁이 벌어진 이 땅에서 국군이 식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그때까지 아주 단순했다. 정부 예산을 받은 육군본부 등 상급기관이 돈을 보내주면 그것으로 사단 및 예하부대들이 자체적으로 양곡과 부식을 구매해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었다. 무기와 장비 등은 미군의 지원으로 해결해 문제가 없었지만, 군인들이 먹는 것만큼은 모두 대한민국이 자체적으로 부담해야 했다.

 군인들은 잘 먹어야 잘 싸운다.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명제지만, 당시 국군의 형편은 썩 좋지 않았다. 나는 각 부대를 방문할 때마다 아주 큰 관심을 두고 일반 장병의 급식 문제를 관찰했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없어 답답했다.

 한 번은 논산에 있던 포로수용소를 시찰한 적이 있었다. 아주 놀라웠던 점이 하나 있었다. 그 안에 갇혀 생활하는 포로들의 급식이 국군의 일반적인 수준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음식 재료 자체가 좋았고, 양 또한 적지 않았다.

 당시 포로수용소는 유엔군이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다. 따라서 포로수용소의 급식은 미국의 기준에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국군은 그에 비하면 형편없는 식사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금물에 몇 가닥 콩나물이 떠 있는 흉내만의 콩나물국, 잡곡이 잔뜩 섞여 있는 거무스레한 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게 국군의 형편이었다.

 포로들은 정기적으로 쇠고기나 돼지고기 등 육류에 생선은 물론이고, 당시로서는 구하기가 힘들었던 단맛이 나는 감미(甘味) 식품도 제공받고 있었다. 예삿일이 아니었다. 전선에서 열심히 싸우는 국군과 전쟁포로의 식사 수준이 정반대의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국군과 포로의 급양 실태조사에 착수하도록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육본은 곧 그 작업에 착수했다. 단순한 품목 비교가 아니라 국군과 포로들이 하루 섭취하는 단백질과 지방의 양을 엄밀하게 계산해 보도록 지시했다. 보고서는 곧 올라왔다.

 결과는 예상 그대로였다. 포로들이 영양이 훨씬 풍부한 식사를 제공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를 정부에 곧장 보고토록 했다. 아울러 국군의 급양 문제를 하루빨리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돈이 문제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 정도에 불과한 최빈국 처지였다.

 조금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외신을 통해 이런 국군의 형편을 외국에도 널리 알렸다. 일부러 외신기자들을 불러 이 상황을 공개했다. 미군에 사정을 정확하게 알려 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미국의 성조지와 영국 신문에는 ‘한국군 급양 실태는 포로보다 못하다’는 제목으로 기사가 크게 실렸다.

 신문에 커다랗게 기사가 실리자 당시 도쿄에 있던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이 국군의 급양 실태에 관심을 갖게 됐고, 급기야는 한국에 있던 미 군사고문단에서도 이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 군사고문단 관계자는 얼마 있다가 나를 찾아와 “한국군 급식체계를 이 기회에 완전히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군사고문단이 내게 권고한 방안은 지금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예산을 보내 하급부대가 자체적으로 급식을 해결하던 방식을 아예 없애라는 얘기였다. 대신 미군처럼 중앙에서 음식 재료를 모두 일괄 구매한 뒤 각급 부대에 공급하라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그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미 국방부인 펜타곤의 중앙조달기구에서 일괄 구매와 공급을 맡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시카고 도축시장에서 값이 쌀 때 쇠고기를 직접 구매하고, 오렌지 값이 가장 싼 수확기에 캘리포니아 농장에서 이를 사들인 뒤 보관 과정을 거쳤다가 각 부대에 공급한다는 식이었다. 나는 미군의 그런 권유를 따르기로 했다. 당장에는 창고 보관시설과 운송 시스템에 문제가 적지 않아 즉시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후락 병참감과 백선진 군수국장(소장 예편) 등의 노력으로 차츰 체계가 잡혀갔다. 이는 후일에 양곡은 농협, 육류는 축협, 수산물은 수협에서 일괄 구매하는 중앙조달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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