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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의용수비대 3인 "박격포 쏘며 일본 배 쫓아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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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 1950년대 독도의용수비대원이었던 정원도·이필영·이규현씨(왼쪽부터 ). 황선윤 기자

"독도가 다케시마(竹島)라뇨? 분해서 잠도 안 옵니다. 정부가 독도를 소홀히 해 이런 일이 생긴 겁니다."

1953년 4월부터 56년 12월까지 3년8개월간 독도의용수비대로 활동한 정원도(76).이필영(81).이규현(80)씨 등 역전의 용사들이 16일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했다는 소식에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어서다.

이들은 이날 오전 자신들이 사는 울릉도 저동항의 한 다방에 모여 의연했던 의용수비대 시절을 회상하며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하는 모습이었다.

정씨는 "이승만 대통령 당시 독도를 기점으로 평화선을 그어 놓고 일본 배가 넘어올 경우 나포하는 등 강력히 대처했다"며 "그때처럼 강경하게 대응했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들이 독도의용수비대로 나선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53년. 정씨는 한국전쟁 때 부상을 입고 명예 전역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있을 때였다. 울릉도 어민들이 독도에 '일본령'팻말이 박혀 있다는 소식을 전하자 이들은 홍순칠(86년 사망) 대장을 따라 나섰다.

이규현씨는 "홍 대장의 제안으로 여럿이 모여 논의한 뒤 53년 3월 의용수비대를 결성했고 4월에 첫 입도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상이 군.경이 중심이 돼 구성된 33명 대원 중에는 민간인 4명도 포함돼 있었다. 독도로 가는 배편은 당시 오징어잡이를 하던 이필영씨가 6t짜리 배를 마련해 해결됐다. 이들은 독도의 서도에 들어가 '일본령 죽도'로 쓰인 나무팻말을 찾아내 뽑았다.

대원들은 그 뒤 2교대로 나눠 한 달에 한 번 독도를 지키는 일에 나섰다. 서도에 움막을 지어 지냈으나 여름철엔 모기, 겨울철에는 폭풍.한파와 싸워야 했다. 얼마 뒤 홍 대장이 어디서 구했는지 박격포(81㎜) 한 대를 준비했고, 대원들에겐 M1과 카빈 소총 한 정씩이 쥐어졌다. 그게 무장의 전부였다. 얼마 뒤 마침내 교전이 벌어졌다.

56년 9월께 일본 순시선이 독도에 접근하려 해 수비대가 박격포를 쏘았는데 포탄이 선상에 떨어졌다.

정씨 등은 "몇 시간 뒤 일본 NHK 라디오를 통해 2명이 부상했다는 소식을 대원들이 함께 들었다"고 말했다.

울릉도=황선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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