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03) 무더기 장군 진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1951년 7월 열렸던 육군 병참학교 졸업식 장면이다. 훗날 박정희 전 대통령 밑에서 중앙정보부를 이끌었던 이후락 정보부장은 52년 백선엽 참모총장이 지휘하는 육군본부에서 병참을 총괄하는 병과장으로 있다가 준장으로 승진했다. 병참을 비롯한 공병·수송·의무·정훈 등 대부분 병과의 병과장이 이때 함께 장군에 올랐다. [국가기록원]

부대에서 군인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가 계급이다. 이마와 어깨에 달고 있는 계급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곳이 군대다. 그 계급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별이다. 별을 단다는 것은 군대에서는 보통 이상의 명예감을 느끼게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군대에서도 별을 달고 나면 여러 가지가 달라진다. 일단 전속 부관과 당번병은 물론이고, 자동차와 단독으로 일할 수 있는 집무 공간을 얻는다. 직책과 월급 등에서 바로 아래의 계급인 대령을 크게 넘어선다. 따라서 군인으로서 광채(光彩)를 발산하는 장군이 되기 위해 장교들이 벌이는 경쟁 또한 매우 치열하다.

 당시 국군 장교 대부분에게 알려졌던 일화가 하나 있다. 장군으로 진급하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어떤 장교가 드디어 별을 달았다. 그는 이런저런 것보다 먼저 멋지게 휘갈겨 쓴 안내문을 한 장 만들었다. ‘하인(何人: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이 방에 들어설 때는 노크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장군 자리에 오른 자신을 얼마나 내세우고 싶었으면 이런 안내장을 자신의 문 앞에 붙일까. 여하튼 그 자체가 군대 내에서 화제가 됐을 법하다. 문제는 아들이 장군으로 진급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찾아 온 아버지였다.

 사무실 문을 들어서려던 그 장군의 아버지가 아들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안내문을 읽고서는 노발대발했던 것. 그 아버지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는 “야 이놈아! 이 늙은 아비도 노크를 하란 말이냐”면서 아들을 크게 꾸짖었다는 것이다.

 군대가 계급사회라는 점에 있어서는 미군을 비롯한 유엔 참전국 군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 계급 구분이 가장 엄격한 곳이 영국 군대였다. 장교들의 책임이 가장 무거운 곳 또한 영국군이다. 앞에서도 잠깐 소개한 적이 있지만, 영국군 포병은 최전방 포대의 중대장이 직접 관측장교를 맡는다.

 포병의 관측은 적진 앞으로 바짝 다가가야 한다. 적과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어디를 향해 포를 쏠 것인지를 관측해야 하는 직무다. 그 관측 책임을 중대장이 맡는 게 영국 포병의 관례다. 그런 장교의 책임에 비례해 그들을 예우하는 정도가 가장 높은 곳이 영국 군대다. 일반적으로 영국군 장교들은 사병들과 같은 식당을 사용하지 않는다. 장군과 장교, 그리고 준사관, 일반 사병들의 식당이 엄격히 구분돼 있다. 위계(位階)가 엄격하고, 그런 권위에 따르는 책임을 고스란히 지는 게 영국 장교들이었다.

 어쨌든 별 자리를 따는 것은 지금이나 당시에나 보통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이뤄지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육군본부의 각 병과장들에게 별 자리를 달아주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먼저 미군에게 내 취지를 설명했고, 이어서 미 고문관을 통해 국방부 장관을 설득했다. 마지막에는 장군 인사를 최종적으로 재가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허락도 얻어야 했다.

 나는 첫 조치로 육본의 각 참모부장을 보좌하는 참모부 차장들과 공병감 같은 주요 병과장 10여 명을 준장으로 진급시켰다. 걸림돌은 없었다. 미군도 이에 순순히 동의했고, 국방부 장관에 이어 이승만 대통령의 허락도 순조롭게 떨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응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무척 까다롭다는 인상을 주면서 사람에 대한 호오(好惡)의 감정이 뚜렷하기는 했지만, 이 대통령은 굵직한 사안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이 대통령이 내가 상신하는 장군 진급 안에 대해서는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던 것이다.

1972년 5월 비밀리에 방북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왼쪽)이 김일성과 만나는 모습. 이후락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남북비밀회담을 성사시켰다. [중앙포토]

 나는 병과장 진급 인사 방안을 계속 올렸다. 매달 몇 건씩에 해당하는 진급 안이었다. 그렇게 해서 몇 개월 사이에 각 병과장이 모두 별을 달게 됐다. 그 안에는 병참감이었던 이후락 대령도 섞여 있었다. 나중에 박정희 전 대통령 밑에서 중앙정보부를 이끌면서 많은 화제를 낳았던 바로 그 인물이다. 내가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마친 뒤 처음 부임한 부산의 5연대에서 나는 그와 함께 있었다. 두뇌회전이 매우 빠르다는 인상을 주었던 사람으로, 말은 다소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업무처리 능력이 돋보였던 인물이었다.

 대령에서 한 단계 승진해 별을 단다는 것은 본인 자신은 물론, 그를 지켜보는 가족들에게도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장군으로 승진한 각 병과장들의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다들 대령 계급장을 달고 업무 협의 대상인 미군 장성들을 만날 때 보였던 의기소침함은 사라지고, 모두 어깨를 활짝 펴고 열심히 업무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또한 주변의 참모진 교체에도 매우 신중을 기했다. 업무 성적이 뛰어난 사람은 가능한 한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와 손발을 맞춰 오던 몇 사람을 기용한 것을 빼고는 다른 참모들을 그대로 유임시키는 방안을 구상했다. 마침 문형태 비서실장이 “참모 인사들을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먼저 그들이 전임자를 잘 보좌했는지를 물었다. 문 비서실장이 “대부분의 참모진이 전임자와 호흡을 잘 맞춘 사람들”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 나는 “그렇다면 모두를 유임시키라”고 지시했다.

 전선에서 싸우는 국군의 후방 지원은 물론, 대통령을 보좌해 전시 상황에서 내려진 비상계엄 국면을 관리해야 하는 자리가 육참총장 자리였다. 아울러 미군과의 빈틈없는 협조를 통해 국군 전투력 증강사업을 신속하게 추진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모를 비롯한 보좌진과의 협조가 물 샐 틈이 없어야 했다. 불필요한 인사 잡음을 최소화하고, 모든 힘을 당면한 과제에 쏟기 위해서는 사람, 그리고 조직원끼리의 단결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나는 그렇게 내가 이끄는 육군본부의 진용(陣容)을 갖췄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