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박사학위보다 태극마크 먼저 따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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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아이스하키는 강인한 체력과 격렬한 몸싸움이 요구되는 대표적인 남성 스포츠다. 헬멧.보호대.스케이트.스틱 등 10㎏이 넘는 무거운 장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해 웬만한 여성들은 엄두도 내기 힘들다. 그런데 키 1m57㎝의 자그마한 여성 사회학도가 늦깎이로 아이스하키에 도전해 최근 국가대표에까지 발탁됐다.

고려대 사회학과에서 박사과정(범죄사회학 전공)을 마치고 논문을 준비 중인 이윤영(29)씨다. 스케이트 한번 타본 적 없고, 대학에 다닐 때 연세대와의 정기전이 열려도 응원차 링크를 찾은 적조차 없던 그는 2003년 3월 우연한 기회에 아이스하키에 입문했다. 당시 박사과정에 재학하던 이씨는 '어차피 공부를 계속할텐데 교내에서 뭔가 취미를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아이스하키를 떠올렸다.

"여러가지로 답답할 때였어요. 그런데 교내 링크를 보는 순간 영화와 TV 속의 화끈한 아이스하키 경기 장면이 연상되면서 갑자기 해보고 싶다는 생각는 드는 거예요. 그래서 시작했지요."

그는 2년간 조교 생활을 하며 힘들게 모은 300만원을 장비 구입과 아이스하키 클럽 회비로 쏟아부었다. 범죄사회학으로 명성이 높은 미국 시카고대를 한번 둘러보는 데 쓰려고 아꼈던 돈이었다.

서울 안암동의 고려대 캠퍼스에서 공부를 마치고 경기도 일산에 있는 클럽팀(경향 이글스)에 들러 훈련한 뒤 다시 서울 서초동의 집으로 돌아오노라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오가는 데 4시간이나 걸리는 힘든 일정이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가용이 없어 무거운 장비 가방을 들고 지하철로 이동하는 게 피곤했어요. 그래도 처음 시작할 때 '300만원을 다 쓰기 전까진 그만두지 말자'는 결심을 했었기 때문에 참고 견뎠습니다."

고생은 헛되지 않았다. 아이스하키에 입문한 지 1년 반이 흐른 지난해 10월, 동료의 권유로 국가대표 선발전에 응시했다가 신승한 대표팀 감독의 눈에 들었다. 다양한 연령층의 동료들과 함께 대표팀에서 고강도 훈련을 받고 지난 2월 정식으로 태극마크를 단 이씨는 다음달 1일 뉴질랜드 더니든에서 열리는 2005 세계여자선수권대회 출전을 준비하고 있다.

"늦게 시작해서 뒤처진다는 기분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알게돼 행복해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제가 아이스하키를 통해 배운 교훈입니다."

성백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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