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 뒤 생긴 ‘뉴딜 연합’ 민주당 황금시대 원동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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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호 20면

“내가 꼭 ‘정당’과 함께 천국에 가야 한다면 나는 그곳에 가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건국 초기에 공화파를 이끌던 토머스 제퍼슨(제3대 대통령)이 1789년 했던 말이다. 그는 연방파와의 치열한 정쟁 끝에 1800년 대선에서 이겼지만 정당정치가 극단으로 치달을 위험성을 감지했다.티 파티(Tea Party) 같은 유권자운동은 미 정당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공화당이란 존재 자체가 1854년 ‘노예제 반대’를 기치로 내건 다양한 정파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노예제 폐지론자, 자유토지론자, 자유토지 민주당원, 부지주의자(Know-Nothings) 등이 가세했다.

미국 역사 속의 유권자 운동

20세기에 미국의 정치지형은 두 번의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첫째는 대공황 이후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대에 구축한 ‘뉴딜 연합’이다. 민주당은 1932년 대선 과정에서 일자리 창출과 경제회복을 기치로 정부 역할 확대를 주장했다. 그 덕에 노동자계급과 가톨릭교도, 남부지역, 흑인, 대도시 거주자, 빈민층 등이 민주당 지지층으로 편입됐다. 이들은 60년대 중반까지 민주당의 표밭이었다. ‘루스벨트-트루먼-(아이젠하워·공화당)-케네디-존슨’으로 이어지는 황금시대를 가능케 했다.

두 번째 변화는 유권자들의 보수성향이 뚜렷해진 80년 대선부터 나타났다. 바로 ‘레이건 연합(Reagan Coalition:보수파와 중도층의 연합)’이다. 70년대 신보수운동에 힘입어 남부와 서부 지역에 거주하는 보수적 성향의 중산층이 공화당 지지로 돌아선 것이다, 이들은 공화당의 모토인 작은 정부, 낮은 세금은 물론 낙태 반대, 흑백 통학버스 반대, 총기 규제 반대, 학교예배 찬성 등의 이슈에 공감했다. 그 결과 레이건에 이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각각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버지 부시 시절까지 합치면 가히 ‘공화당 우위 시대’였다.

이번에 티 파티 운동이 주장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간단하다. 버락 오바마 정부 들어 글로벌 금융위기와 건강보험 확대 등으로 세금이 늘고 재정적자가 확대되고 있는 데 대해 남부지역과 중·노년 백인 유권자들의 반발심리가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남부지역 유권자들의 탈(脫)민주당 성향이다. 이들은 민주당이 흑인들의 인권·복지에 적극적일수록 등을 돌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64년 대선 당시 존슨 대통령은 공화당 후보인 배리 골드워터와 ‘민권법’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 결과 민주당은 흑인 표를 잡았지만 남부지역 백인 중산층을 잃게 됐다. 리처드 닉슨의 ‘남부 전략’은 집요하게 백인 유권자들을 파고들었다. 9·11테러 이후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합세로 유권자들의 보수화 성향은 굳건해졌다. 빌 클린턴 시절인 98년 중간선거 당시 공화당은 남부에서 78석을 얻어 민주당(71석)을 앞질렀다. 이런 추세는 98년에도 확대됐다. 조지 W 부시 시절엔 남부지역에서 공화당의 지지도가 1950년대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을 추월했다.

정치적 성향을 띤 유권자운동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에선 전통적으로 여성운동, 환경운동, 동성애자들의 입김이 센 데 비해 공화당에선 전통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개신교도, 낙태반대론자들이 뜨거운 지지를 보낸다. 보수단체들은 전국적·전문적 조직을 갖춰 기존의 풀뿌리 시민단체와 비교할 수 없는 파워를 발휘한다. 베이비부머 세대 가운데 무당파를 자처하는 그룹의 보수화도 변수다. 예컨대 레이건 시절 첫 투표권을 행사했던 50대들은 공화당에 가까운 성향이다. 민주·공화 양당은 그동안 시민단체를 비롯한 외부세력과 연대하거나 새 인물을 영입해 당세 확장을 시도해왔다. 양당 모두 티 파티 운동의 결과에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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